최인호 장편소설 『지구인(地球人)』
최인호(崔仁浩. 1945~2013)의 장편소설로 1979년 [문학사상]지에 연재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실제 1971년 여름부터 3년간 많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이종대·문도석의 삶을 오랜 기간 동안 작가가 추적. 집필한 것으로, 실제 상황에 근거를 둔 소설이다. 이 소설은 1978년부터 1984년까지 7년 동안 연재했던 작품으로, 특히 교도소에서 가장 많이 읽힌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작가는 1974년 많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이종대ㆍ문도석의 카빈 2인조 강도살인 사건에 관한 기사를 접하고 나서 이 소설을 구상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3, 4년 뒤 이종대의 배다른 동생 '종세'를 만나 친분을 쌓으면서 본격적으로 집필하기 시작했다.
이 소설은 연재 도중 정보기관의 압력으로 베트남전쟁 참전 용사들의 아픔을 그린 내용이 대폭 삭제될 수밖에 없었고, 연재가 중단된 1980년에는 삼엄한 시대상황 속에서 뒷부분을 생략한 채 두 권의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연재가 마무리된 1984년에는 [중앙일보]사에서 세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지만, 여전히 삭제된 부분을 복원할 수는 없었고, 1988년 개정판을 내면서 일부 보충해야만 했다.
장편소설 『지구인』의 주인공들의 처지를 결정한 것은 그들로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던 전쟁이었으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이들에겐 죄가 없다. 따라서 범죄는 유전이 아니며, 절대의 공포와 폭력을 먼저 보여준 것은 사회였으며, 종대와 도석과 종세를 포함한 장편소설 「지구인」의 모든 등장인물들은 어쩌면 다만 그 사회적 폭력으로부터 탄생한 희생양, 즉 파르마코스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작가는 강조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이종세는 악몽에 시달리다 아내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눈을 뜨지만, 불안한 마음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이때 초인종 소리가 울리며 전투복차림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온다. 형사들로부터 이복형인 이종대에 대해 추궁을 당하던 이종세는 형사들과 함께 인천으로 향한다.
이때, 인천의 최정병 씨 댁에서는 그의 이복형 이종대가 그의 아내 황은경과 그의 아들 태양, 딸 큰별이를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 중이었다. 종대의 이복동생인 종세가 다가가 형을 설득하려 하나, 그 둘은 서로 간의 이질감만 높아간다. 대치 상황을 뒤로한 채 종세는 서울로 향하고, 종대에 관한 강한 비난과 저주를 퍼붓는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자신과 이복형 종대를 생각한다. 이종대는 이종세의 배다른 형이었다. 종세가 떠올릴 수 있는 그의 형에 대한 기억은, 누가 냇물 속에서 머리를 물에 처박고 오래 있는가 하는 장면이다, 여기에서 이종대는 얕은꾀로 항상 그의 이복동생 이종세를 이겼다. 어렸을 때부터 이러한 죄의식의 전도 현상은 그를 역전의 불량배로 자라게 해 주었고, 그러한 생활 속에서 인간성 모멸의 상처를 입게 되었다.
군에 입대한 종대는 미군 부대에서 인간성 해체의 현실을 접하게 되었고, 양색시 영숙에 대한 사랑을 잔인한 학대 증상으로 표현했다. 급기야 미국 병사 마이클과의 싸움으로 그는 처음으로 살인의 쾌감을 맛본다.
이종대는 제대 후 또다시 폐광의 노동자 등의 밑바닥 인생을 계속하다가 교도소에 가게 된다. 그러나 치밀한 계획 속에 교도소를 탈출, 도피 행각을 하게 된다.
이종대는 그와 뜻이 맞는 문도석과 함께 점차 대담한 범행을 저지른다. 그가 태어나 처음으로 마음을 주었던 그의 아내에게는 모든 것을 숨긴 채, 그들의 범행은 점차 대담해지고, 그 횟수를 더해 간다. 수제(手製) 카빈총을 휘두르는 그들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이런 행적으로 결국 막다른 궁지에 몰린 이종대는 자신의 아들딸과 아내 황은경을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한다. 사회에 대한 온갖 불만을 다 토로하지 못한 채, 수 발의 총성을 뒤로하고, 동반 자살이라는 이름을 안고 죽어간다.
이 소설은, 소년기(6ㆍ25)와 청년기(월남전)를 보내며 받은 내적 상처를 치유받지 못한 주인공을 통해 우리 시대의 비극적 현실과 더불어, 고도한 산업사회와는 무관하게 사는 밑바닥 삶의 인생을, 하나의 단면 속에 보여주려 하였다. 우선 사회의 가공할 폭력과 그 폭력이 강요하는 운명을 거스를 길 없는 초라한 개인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젊은 작가들이 즐겨 다루는 주제를 선도하고 있고, 비루하기 그지없는 하류 인생, '파르마코스'(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디오니소스 축제 때 집단적으로 살해당했던 밑바닥 사람들)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도 오늘날 젊은 작가들의 경향과 일치한다.
수많은 파르마코스들이 희생양으로 사라진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서 『지구인』은 이제 온전한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나 우리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제물로 삼은 파르마코스들은 사실 우리 안에 있다. 남의 가족이 죽더라도 내 가족은 잘살아야 하는 우리, 타민족은 기아에 허덕이더라도 우리 민족이 배부르면 괜찮은 우리,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해 전쟁을 불사하는 우리 안에 '악'이 있고,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한 우리 '지구인'은 악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파르마코스이다.
또한, 전후의 거친 삶이 고조되는 이종대의 이복동생인 이종세를 통해 이종대라는 인간이 왜 흉악한 살인범이 되어야 했는가를 해명하며, 한 인간에 미치는 역사와 시대의 영향을 간접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
작가는 『지구인』에서 주인공들의 과거를 추적하면서 잔인한 범죄의 또 다른 원인을 찾았다. 이 소설에 따르면 그들의 범죄 이력에는 격정적인 악마성만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전쟁 이후 1970년대까지 온갖 고난이 두 사람을 극한으로 몰아갔고, 그에 맞서면서 그들은 점차 괴물로 변해갔다. 소설에서 특히 인상 깊은 부분은 이종대가 총을 대하는 순간이다. 작가는 이종대가 총을 처음 쥐는 순간 운명처럼 악의 길로 접어든 것으로 묘사했다. 타인을 굴복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힘-권력이 총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종대는 희대의 악인이 되었다. 어떻게 한 인간이 거대한 힘의 유혹에 빠져들고 악과 조우하는지를 보여준 것이 소설 『지구인』의 공감대였다.
한편, 인간 생명의 원초성 문제에까지 손을 댐으로써 작가는 신에 의한 구원을 제시하고, 신에 대한 신념의 광경을 은연중에 보여주게 된다. 즉, 오빠(문 중사)는 죽어서 그녀(문혜옥)에게 돌아오고, 종세는 상처투성이인 육신과 정신을 가지고 돌아와 그녀에게 귀의한다. 작가의 놀라운 인간 탐색 능력이, 우리 사회의 파행적인 문제들을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1972년 9월, 이종대와 문도석은 경기도 평택의 예비군 무기고에서 M1 카빈 소총 3정과 다수 실탄을 절취한 뒤 2년 동안 2인조 강도로 현금을 탈취하고 살해하는 등 범행 행각을 벌였다. 대낮 총격전까지 벌이던 2인조 강도는 이후 1년 동안 행적을 드러내지 않았고 경찰은 수사에 난항을 겪었다. 그러던 중 이들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꼬리가 잡혔다.
1974년 7월 25일 경기도 화성 오산역 근처 주차장. 새벽 운행을 나가려던 택시기사에게 등산복을 입은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건 것이다. 시 택시기사 강 모씨는 "등산모자챙 작은 거 쓰고선 한 놈이 딱 오더라. 택시 타고 서울을 간다더라. 오산에서 서울까지 가면 택시요금이 잘 나오니까 타라고 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일행이 있으니 어디를 들렀다 가자고 했다. 알겠다고 하고 행선지를 물으니 죽미 고개라고 하더라. 그 순간 느낌이 싸했다. 죽미 고개는 외지고 인적도 드물기 때문"이라고 회상했다.
택시기사가 만난 남성들의 정체는 문도석, 이종대였다. 이들은 교도소에서 알게 된 사이로 출소 후에도 인연이 이어졌다. 심지어 비슷한 시기에 각자 결혼을 하고 자녀도 낳았다. 택시기사의 신고로 경찰에 쫓기게 된 문도석은 자기 집으로 가 "이 더러운 세상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내 아이는 내가 데려가겠다"면서 아들을 2층으로 데려갔다. 이후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아들을 쏘고 자신도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이종대도 마찬가지로 집에 돌아왔는데 그때 집에는 큰아들 태양과 둘째 아들 큰별이가 있었다. 경찰이 새벽 2시 30분경 집을 포위하자 이종대는 카빈총을 장전했다. 그러고는 "어차피 죽은 목숨 내 목숨은 내가 정한다"라고 외쳤다. 그렇게 잔혹한 인질극이 시작됐다.
아내와 자식들을 잡고 인질극을 벌이던 이종대는 가족에게 총구를 겨눴고, 달력 뒷면에 유서를 남겼다. 방송에 따르면 유서에는 '태양아 큰별아 미안하다. 여보 당신도 용감했소. 너희들 뒤를 따라간다. 황천에 가서 집을 마련해 호화롭게 살자. 이 냉혹한 세상 미련 없다'라고 적혀 있었다. 마치 자신들은 잘못이 없고 가족들이 스스로 삶을 마감한 듯한 유서였다. 강도 행각과 살해를 저지른 범죄자들의 비극적인 최후였다.
☞ 영화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
이장호가 감독한 영화로 1982년 개봉되었다. 이종대·문도석 사건을 소재로 만든 영화로 박일, 이영호, 방희가 주연을 맡았다. 1982년 6회 [황금촬영상] 시상식에서 촬영상-금상, 조명상, 특별상 (준회원) 등을 받았으나 흥행에는 실패한 작품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교도소 동창생 이종배와 문도석은 출옥 후 개머리판이 없는 칼빈총으로 범죄를 계획하여 일차범행을 성공적으로 끝내지만 살인을 저지르게 된 도석은 괴로움에 빠진다. 그러나 이종배는 제2, 제3의 범행을 감행하고 그때마다 피해자가 생긴다. 종배의 부인 황여인은 남편에게 자수를 권하나 종배는 일소에 붙인다. 제3의 범행을 준비하는데 뜻하지 않은 사건이 생겨 신분이 노출되자, 종배와 도석은 쫓기는 몸이 되어 가족들을 찾아 죽인 후 자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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