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 단편소설 『병신과 머저리』
이청준(李淸俊,1939∼2008)의 단편소설로 1966년 9월 [창작과 비평]에 발표되었다. 1967년 제13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1950년대 전후소설의 허무주의적이고 난잡한 작품 세계를 뛰어넘어, 작가의 감정 개입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논리적인 문체와 액자 소설 양식을 통한 형식적 완결성의 추구 등으로 소설 영역의 새로운 경제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6ㆍ25전쟁을 겪으면서 직접적인 상처를 받은 형과, 다만 관념으로서의 아픔을 지니고 있는 동생간의 갈등과 대립이 주제를 형상화하고 있는데, 이러한 갈등과 대립은 그들이 겪은 경험의 차이에서 유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환자의 죽음으로 인해 받은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소설적으로 변형시키는 형과는 달리, 동생은 자신이 지닌 상처의 근원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상처를 치유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병신과 머저리'이다. 개인의 의식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요건이 되는 '경험'과 '관념'이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청준은 예술가로서의 소설가 혹은 지식인의 대(對) 사회적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가를 항상 고심하는 작가이며, 그 고심의 치열함이 소설의 지적 특성으로 드러난다. 『병신과 머저리』에는 이러한 고심의 구도가 전형적으로 드러나 있다. 의사인 형과 화가인 동생, 이 둘이 합해지면 지식인 예술가가 되며, 이 둘의 고민은 삶을 적극적으로 창조해나가지 못하는 자신들의 피동성에 있다.
형이 관모와 김일병의 문제를 능동적으로 처리하지 못한 것, 동생이 소극적 사랑으로 실연에 이르는 것은 이들의 개성이 수용적 특성에 기울어져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이들은 세계가 자신들을 훼손하고 있다고 느끼며, 그것을 극복하려는 데서 형과 나, 혹은 이청준 소설의 모든 인물들의 고심과 저항은 치열해진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나'는 화가다. 형 친구의 소개로 한때 화실에 나왔던 '혜인'에게서 청첩장을 받는다. 그녀는 '나' 대신에 장래가 확실한 의사를 배우자로 택한 것이다. '나'는 무기력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림은 진전(進展)이 없다.
형은 의사다. 6ㆍ25 때 패잔병으로 낙오되었다가 동료를 죽이고 탈출했다는 아픈 과거를 지니고 있다. 20여 년 동안 외과 의사로 실수 한 번 없던 그가, 달포 전 수술을 한 어린 소녀가 죽자 병원 문을 닫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것은 형의 체험담이었다.
소설의 중심인물은 셋이다. 표독한 이등 중사 오관모, 신병 김 일병, 그리고 서술자인 '나'(그것은 형이다)였다. 그들은 패주한다. 김 일병은 팔이 잘려 나가 썩어 가고 있다. 그들은 동굴 속에서 숨어 지낸다. 오관모는 전부터 김 일병을 남색(男色)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김 일병의 상처에서 나는 역한 냄새로 그 짓이 불가능해지자 김 일병을 죽이려 한다.
형의 소설은 거기서 멈춰 있다. '나'의 그림 역시 진전이 없다. '나'는 형 대신 소설의 결말을 써 나간다. ―오관모가 오기 전에 형이 김 일병을 쏘아 버린다. 형은 참새가슴처럼 떨고 있다.― 라고. 형은 내가 쓴 결말을 읽고는 병신, 머저리라고 '나'를 욕한다. 그리고는 ―오관모가 김 일병을 죽이고, 뒤따라간 자신이 오관모를 죽이는 것으로 끝맺는다.
이 뜻밖의 결말은 '나'를 혼란에 빠뜨린다. 그런데 '혜인'의 결혼식에서 돌아온 형은 자신의 소설을 태워 버린다. 결혼식장에서 오관모를 만났다는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 형은 건강한 생활인으로 돌아가 다시 병원 문을 연다.
소녀의 수술 실패를 계기로 돌연 병원을 닫고 매일 술을 마시며 느닷없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형과, 의지의 모습으로 신을 위협하는 인간의 얼굴을 그리고자 하지만 둥그런 얼굴 윤곽만 그리고 더 이상 그리지 못하는 화가인 동생.
형은 6ㆍ25의 아픔을 직접 체험한 존재로, 동생은 환부다운 환부를 갖고 있지 않은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형은 참전 세대로서 6ㆍ25의 체험을 생생한 아픔과 과실 치사의 죄의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인물이다. 이에 반해 동생인 '나'는 그런 절실한 체험도 없을뿐더러 무기력하게 자신을 포기한 존재이다. '나'는 인간의 원형적 얼굴을 그려내려고 하지만 그림은 늘 진전이 없다. 자신의 힘으로는 그 '얼굴'을 찾아내지 못하리라는 불길한 예감과 까닭 모를 패배감에 젖어 있다.
이와 같은 기질과 인생관을 지닌 형제는 강렬하게 부딪힌다. '혜인'을 붙잡지도 못하고 그림으로 자신의 억눌린 욕구를 표현하고자 하는 '나'와 극한 상황의 비인간성 속에서 자신에 대한 극도의 환멸을 맛보았던, 그리고 그 환명에 대한 분출구로써 소설을 쓰기 시작한 형이 갈등을 빚는다.
우선 형은 자신이 쓴 소설의 결말을 동료(김 일병)를 쏘아 죽인 상급자(오관모)를 자기가 직접 쏘아 죽이는 것으로 씀으로써, 현실과의 싸움이 아무리 절망적일지라도 미리 포기하는 것보다 싸우다 파괴되는 것이 훨씬 성실한 삶이라는 자기 인식에 도달한다. 결국, 형의 소설 쓰기는 체험의 회고가 아니라 자기 연민을 벗어나고자 하는 완벽한 재구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형이 자신의 전쟁 체험을 소설 쓰기나 상급자(오관모)와의 극적인 상봉을 통하여 해소하는 과정을 보면서 자신의 처지에 대한 참담한 비애를 느낀다. 그에게는 형과 같은 뚜렷한 정신적 상처도 없고 근원이 분명한 심리적 고통도 없기 때문이다.
♣
나의 아픔은 어디서 온 것인가. 혜인의 말처럼 형은 6ㆍ25의 전상자이지만, 아픔만이 있고 그 아픔이 오는 곳이 없는 나의 환부는 어디인가. 지금 나는 엄살을 부리고 있다는 것인가. 결국, '나'는 형과 같은 구체적인 갈등 속에서 외부와 싸우기보다는 수동적인 관조 속에서 현실을 회피하는 가운데 점점 소멸의 시간들을 맞이해 가고 있다. '병신과 머저리'는 바로 '나'인 셈이다.
그리고, 이 작품의 갈등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의 실천에 관한 형과 동생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형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행동적 유형의 인물이며, 동생은 완벽한 실천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이 완벽해질 때까지 계속 고민만 하는 회의적 유형의 인물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또 다른 핵심은 작품 결말에 오관모가 다시 등장하는 데 있다. 형이 소설에서 죽인 것과는 달리 오관모(이기심과 생존 욕구)는 여전히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떤 한 개인이 관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그 문제가 실제 현실에서 해결되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 소설은 주장한다.
『병신과 머저리』에 드러난 것처럼 이청준은 자아를 훼손한 최대의 문화사적 횡포를 6ㆍ25전쟁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문맥에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4ㆍ19혁명의 발발과 좌절 또한 이 작품의 제작에 깊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병신과 머저리』란 제목은 1960년대적 상황에 대한 자조적 작가의식이 빚어낸 것이지만, 그러한 자조와 자학을 넘어서고자 하는 치열한 모색에서 이청준 소설의 만만치 않음과 힘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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