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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빈민들의 힘든 삶과 그들의 희망을 그린 - 채플린 작. <시티 라이트>

by 언덕에서 2011. 2. 2.

 

 

빈민들의 힘든 삶과 그들의 희망을 그린 - 채프린 작. <시티 라이트>

 

 

 

모두가 유성영화에 열광하고 있던 1931년의 할리우드. 채플린은 <시티 라이트>에 사운드를 입히는 문제로 고심하다 원래 의도대로 무성영화로 작업을 끝낸다. 그리고 당시 평론가들은 그의 뚝심있는 작업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 영화는 앙상한 채플린이 거구의 근육질 남자를 상대로 벌이는 권투시합 장면과 소녀가 처음으로 자신의 은인을 알아보는 마지막 장면이 유명하다.

 

 

 

 채플린은 영국 태생 미국의 희극배우ㆍ영화감독으로 런던 출생이다. 뮤직홀 연예인이었던 찰스 채플린과 한나 채플린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8세 때 나막신춤 프로인 <8명의 랭커셔 소년들(Eight Lancashire Lads)>에서 처음으로 무대에 섰다. 그 뒤 곧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는 정신병원을 드나들었기 때문에 어린시절을 기숙학교와 고아원 등을 전전하며 보냈고 때로는 거리에서 생활하면서 무대에 서기도 했다. 17세 때 영국의 보드빌 극단인 프레드 카노 극단에서 일하고 있던 그의 이복형이 이 극단에서 일자리를 구해주어 1913년까지 카노 극단에 소속해 수많은 뮤직홀에서 풍자극에 출연했다.

 1913년 카노 극단의 뉴욕 순회공연 중 키스톤사의 슬랩스틱류의 단막 희극영화 제작자인 맥 세넷의 눈에 띄어 키스톤사와 영화출연계약을 맺었다. 그 해 12월부터 주급 150달러를 받고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으며 연극무대와는 영원한 작별을 고했다. 2번째 영화인 <베니스에서의 어린이 자동차 경주>(1914)를 찍으면서 중산모에 꼭끼는 프록 코트, 헐렁한 바지, 커다란 신발, 콧수염, 지팡이 등 그의 독특한 의상을 처음으로 고안해냈는데 그때까지는 자신의 특징인 애수를 자아내는 인물묘사와 방랑자로서의 중요한 인물특성이 구체화되지 않았다.

 


 

 그의 코미디 영화들은 1주일에 2편꼴로 급히 제작되었지만 처음부터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다. 곧 그는 자신이 출연하는 모든 영화의 감독을 맡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봉급이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뛰어올라 1915년 에세네이영화사로부터는 주급 1,250달러를 받았으며, 1916년 뮤추얼영화사로부터는 주급 1만 달러에 계약 보너스로 15만 달러를 받았고, 이듬해 퍼스트내셔널영화사와는 8편의 영화출연 계약으로 100만 달러를 받았다. 2년 뒤 당대 유명한 스타였던 메리 픽퍼드,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D. W. 그리피스 감독과 함께 유나이티드아티스츠영화사를 설립해 각각 독자적으로 자신들의 영화를 제작하여 보급할 수 있게 되었다. 퍼스트내셔널사와의 계약이 <순례자>(1923)를 끝으로 만료된 뒤 그는 1966년 유니버설영화사 작품인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을 만들기까지 오직 자신의 영화사 작품을 제작했다.

 채플린 자신은 그의 영화의 주인공을 '작은 친구'라고 불렀는데, 이 인물의 특성은 <편안한 거리>(1917) <어깨총>(1918) <키드><황금광시대><도시의 불빛><모던 타임스>, 그리고 그가 제작한 첫 유성영화 <독재자>(1940) 등에서 발전되어갔다. 이 인물은 그의 자전적인 영화 <라임라이트(Limelight)>(1952)에서도 짧기는 했지만 재등장했다.

 채플린의 개인적인 삶은 파란만장했다. 그는 4번 결혼했는데 3번은 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던 밀드레드 해리스(1918), 리타 그레이(1924), 폴레트 고더드(1936) 등 여배우들과의 결혼이었으며, 1943년에는 극작가 유진 오닐의 딸 오나 오닐과 결혼했다. 첫번째와 2번째의 이혼은 1944년 친자확인 소송 때처럼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또한 1942년 독일과의 전쟁에서 채플린이 후방근무를 요청한 것이 다시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채플린의 정치적 입장은 부분적으로 그가 미국 시민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오늘 소개하는 <시티 라이트>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아침 산책길에서 떠돌이 찰리는 꽃 파는 눈먼 소녀를 만난다. 찰리는 주머니의 마지막 돈을 털어서 소녀의 꽃을 사준다. 소녀는 찰리가 부자인줄 오해하지만 찰리는 가난한 떠돌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못한다. 찰리는 눈 먼 소녀가 꽃을 팔아서 할머니와 겨우 살아간다는 사실과 밀린 방세 때문에 거리로 쫓겨날 것을 알고 고민한다. 눈 먼 소녀의 방세를 해결하기 위해 급기야 그는 도박 권투시합장에 가서 내기 권투를 하나 무참하게 K.O패를 당한다. 찰리는 술에 취한 백만장자를 구해주어 많은 돈을 얻게 된다. 찰리는 그 돈을 눈먼 소녀에게 주며 눈수술을 할 것과 밀린 방세를 낼 것을 당부한다. 하지만 그 백만장자가 술이 깨면서 찰리를 알아보지 못해 도둑으로 몰린다.

 

 

 

 찰리는 백만장자의 돈을 훔쳤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몇 달 후 출옥한 찰리가 초라한 모습으로 거리에 나타난다. 찰리가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소녀(소녀 보다는 처녀라는 표현이 맞겠다)는 찰리가 준 돈으로 개안수술을 하게 되어 시력을 회복하고 나머지 돈으로 꽃집을 차려 번창하게 된다. 거지모습으로 꽃집 앞을 지나가던 찰리를 본 소녀는 불쌍한 거지라고 생각하여 찰리의 손에 돈을 쥐어주게 된다. 순간, 소녀는 손끝의 감각으로 찰리가 바로 그 친절한 부자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당신이 맞죠?” 여기에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채플린은 미국에서 제작된 무성영화 <시티 라이트>에서 익살스럽지만 애수를 담고 있는 떠돌이의 모습으로 등장,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1914년 영화에 처음 출연한 이후 2년 만에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한 사람이 되었다. 1920년대 초반이 되자 그가 출연하는 영화의 흥행성은 대단해 어떤 영화사도 그에게 출연료를 지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제작한 영화에만 출연했다. 1920년대 말엽 유성영화가 도입된 이후에는 거의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지만 그의 초창기 작품들이 영화의 고전으로 인식되었고 재상영되었을 때도 새로운 관객들의 찬사를 받아 그의 명성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 영화는 당시 하층 빈민들의 힘든 삶과 그들의 희망을 그린 이 작품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프랑스 정부는 채플린에게 레종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며 그의 공적을 치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