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시간은 결국 지나가고야 마는가? 허진호 작. <봄날은 간다>
영화는 치매에 걸린 상우의 할머니를 자전거를 탄 상우가 따라가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상우 할머니가 간 곳은 기차역인데 그녀는 하염없이 플랫폼을 바라보며 할아버지를 기다린다. 상우의 가족들은 저마다 사랑에 대한 상흔(혹은 기억)을 간직하며 살아간다. 즐거웠던 한 때를 기억하며 수색역에서 무작정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치매걸린 할머니(백성희),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아내를 떠나 보내고 홀아비로 오랜 세월을 살아온 아버지(박인환), 그리고 지금은 이혼(?)하여 오빠집에서 더부살이 하는 고모(신신애)는 모두 생의 봄날을 보내버린 인생들이지만, 현재의 처지에 대해 불평을 하거나 불만을 갖지는 않는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겨울을 보낸 상우(유지태)는 우연한 기회에 이혼녀 은수(이영애)를 만나면서 생의 봄날을 만끽하게 된다.
상우와 은수가 대밭에서 대나무소리를 들으려 귀를 기울이는 장면은 아름답다. 은수와 상우가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장면, 이어지는 장면인 은수의 할머니 인터뷰 장면에서 할머니의 연기는 자연스러우면서도 처연하다. 무엇을 암시할까?
사운드 엔지니어 상우는 지방 라디오 방송의 아나운서 겸 프로듀서인 은수와 함께 자신이 맡은 소리채집 여행을 떠난다. 잔잔하고 여운 깊은 자연의 소리를 녹음기에 담으면서 둘은 서로에게 끌리며 점차 깊은 사랑에 빠져든다.
그러나 이혼 경험을 가진 연상의 여성 은수는 상우가 불쑥 꺼낸 결혼 얘기를 부담스러워한다. 어느날 술을 많이 마시고 찾아 와서 재롱을 부리는 상우에 대한 은수의 대답은 "우리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이다. 다음날 아침 은수는 타고 가던 버스에서 내려서 되돌아와서 상우에게 헤어지자고 말하고, 상우는 내가 잘하겠다고 답한다. 하지만 은수는 다시 헤어지자고 요구하고 이에 대한 상우의 답은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인 "너 나 사랑하니?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이다.
이미 이혼의 경험이 있는 은수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이 부족하고 자유분방한 생활을 원하는 여자처럼 보인다. 은수는 또다른 남자인 음악평론가와 밀월드라이브 여행을 하는 등 상우에게 깊은 상처를 준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이영애라는 배우를 싫어하게 된 것은 이 영화에서 받은 팜므파탈femme fatale 이미지 때문인 것 같다.) 그렇게 은수는 상우로부터 조금씩 뒷걸음치고 결국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된다. 시간이 흐른 어느날 사무실에서 종이에 손을 벤 은수는 자기도 모르게 심장 위로 손을 들어올리는데 그러한 자신의 행동에서 상우를 떠올린다. 다시 만나게 된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은수는 화분을 내밀며 할머니께 갖다 드리라고 한다. 벚꽃이 핀 거리에서 은수는 상우에게 팔짱을 끼며 "우리, 같이 있을까?"라고 묻지만 상우는 말없이 화분을 돌려주며 떠난다. 굳이 대답하지도 할머니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상우 또한 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별을 받아들인 것이다.
은수가 떠난 후 상우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지만 뒤돌아서 인사하는 은수에게 손을 흔들며 힘들지만 태연하게 이별을 받아들인다. 상우는 집에 와서 녹음한 은수의 노래를 듣는다. 이 배경음악이 깔린 채로 상우가 갈대밭의 바람 소리를 녹음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봄날은 간다〉는 열병처럼 찾아온 사랑이 서서히 식어가는 과정을 허진호 감독 특유의 절제된 연출력을 동원하여 잔잔하게 그려 나간 작품이다. 더디고 나른한 흐름에서 오는 무미건조함이 오히려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옛사랑의 상처를 후벼 파는 부분은 이 영화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다. 유지태와 이영애의 건조한 듯 자연스러운 연기도 좋지만 자연을 담은 영상미와 음향 또한 빼어나다.
이 영화는 두드러지는 갈등상황이나 긴장보다는 절제되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상황의 연속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그 과정에서 몇몇 대사의 간결하고도 효과적인 의미전달과 서정적인 화면에서의 배경음악 처리가 인상 깊다. 카메라의 앵글도 과함과 부족함 없이 보여주고자 하는 바를 잘 전달해주고 있다. 주연인 유지태와 이영애 또한 영화에 맞는 과하지 않으면서도 할 말 다 하는 표정과 톤이 올라가지 않고 길지 않으면서도 의미가 명확한 대사를 잘 소화하고 있다. 특히 유지태가 맡은 상우 역은 실연당한 남자를 너무나도 잘 나타내고 있다는 평이 많았다. 이 영화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전형적인 과정을 조용하고 잔잔한 톤으로 표현한다. 지루함이 느껴지지 않는 바탕에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감독과 각본의 능력이라고 보여진다. 제목인 <봄날은 간다>」는 행복한 시간인 '봄날'은 결국 지나간다는 것으로 주제를 잘 압축하면서 영화의 분위기와 잘 맞는 제목선택으로 보인다. 주제가인 자우림 김윤아의 노래도 영화에 매우 잘 어울리는 수작이다.
이 영화는 제 18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1998) : 최우수작품상, 제 22회 청룡영화상 (2001) : 최우수작품상, 제 14회 도쿄국제영화제 (2001) : 예술공로상, 제 6회 부산국제영화제 (2001) : 국제영화평론가협회상, 제 2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2001) : 최우수작품상, 감독상(허진호), 여우주연상(이영애), 제 38회 백상예술대상 (2002) : 영화감독상(허진호)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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