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잔인한 영화... 멜 깁슨 작. <THE PASSION OF THE CHRIST>
IPTV의 보급으로 이제는 굳이 영화관이나 비디오가게에 가지 않더라도 HD화면의 실감나는 영상으로 보고싶은 영화를 마음껏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2004년 개봉되어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파문을 몰고왔던 영화 「THE PASSION OF THE CHRIST(그리스도의 수난)」는 당시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영화관을 나와버린 기억이 난다. 이제 시간이 좀 흘렀으므로 남긴 숙제를 마치는 기분으로 다시 영화를 보았다. 오늘은 이 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들을 하도록 하겠다. 이 영화는 아람어와 라틴어를 살려내었으며 4복음서의 철저한 고증이 대단하여 역사적인 사실에 부합한다는 평이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서 머릿속에는 십자가형의 잔혹함만 남았다. 2004년 제작된 이 영화는 멜 깁슨식 폭력에 파묻혀 종교영화로는 실패작이란 느낌이 들었다.
영화 「THE PASSION OF THE CHRIST(그리스도의 수난)」는 당시 개봉 전부터 떠들썩한 소문을 몰고 왔다. 반유태주의 색채가 짙다, 유태인을 향한 증오의 영화다, 영화를 보던 미국 여성이 심장마비로 죽었다, 사실적인 표현이 감동적이다, 유혈 낭자한 장면 밖에 기억에 남지 않는다….
찬사와 악평이 한꺼번에 쏟아졌고, 하여간 제작자, 감독인 멜 깁슨은 돈방석에 올라앉았다. 어찌됐든 이 작품은 종교영화임이 분명하고,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기독교와 관련한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
「THE PASSION OF THE CHRIST」는 복음서가 전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受難)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그리스도교의 경전인 신약 성서는 모두 27권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중 맨 앞의 네 권(마태오(마태)·마르코(마가)·누가·요한 복음)을 복음서라고 부른다. 복음서에는 탄생부터 부활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이 그려져 있다. 그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이하 '예수'로 칭함)가 체포된 후 십자가형을 받는 12시간 동안의 이야기를 「수난사화(受難史話)」라 부른다.
당시 이스라엘 땅에서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제도권 종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를 죽여야만 할 이유는 넘치고도 남았다. 가까운 예로 설명하자면 유교를 신봉하던 서인 노론세력이 자신들과 다른 학문을 믿는 천주교를 박해한 조선말기와 별다르지 않다. 역사는 늘 반복하지 않는가? 예수의 파격적인 말과 행동에서 심각한 위기감을 느낀 제도권 종교인들은 예수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유태교 종교지도자들은 민중으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는「유태인의 왕(王)」을 처벌하지 않으면 로마 황제에 대한 불충이라는 식으로 빌라도를 협박했다. 그들은 상당한 정치 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예수는 종교범으로 판결을 받았는데, 실제로는 정치범으로 사형을 당했던 것이다. 정치범은 통상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마지막 만찬 후에 겟세마니 동산에 올라간 예수는 그 곳에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친다. 그러나 그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에게 배신당해 체포되어 예루살렘으로 끌려온다. 바리새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성 모독죄로 단죄하고,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한다.
팔레스타인의 로마 제독, 빌라도는 바리새인들의 주장을 들으며 그의 앞에 끌려온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한다. 자신이 정치적 위기에 직면해 있음을 깨달은 빌라도는 이 문제를 헤롯왕에게 의논한다. 헤롯왕은 빌라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돌려보낸다. 이에 빌라도가 군중들에게 그리스도와 죄수 바라바 중 누구를 석방할지 결정하도록 하자, 군중들은 바라바에게 자유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형을 주장한다.
로마 병사들로부터 처참하게 채찍질을 당한 그리스도는 빌라도 앞에 다시 끌려오게 된다. 빌라도는 만신창이가 된 예수 그리스도를 군중에게 보이며,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라고 묻지만 피에 굶주린 군중들은 만족하지 못한다. 딜레마에 빠진 빌라도는 군중들이 원하는 대로 처리하도록 부하들에게 명령한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예루살렘 거리를 지나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를 메고 가도록 명령을 받는다. 골고다 언덕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고 그 곳에서 마지막 유혹에 직면한다. 그의 아버지가 그를 버렸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어머니인 마리아를 바라보며 그녀만이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마지막 한 마디를 하고 죽는다. “다 이루었도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복음서의 서술은 각기 조금식 차이가 나지만 매우 사실적이다. 로마의 사형 방법은 목을 자르는 참수형, 굶주린 맹수들의 먹이로 넘겨 주는 맹수형, 그리고 십자가형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중에서도 십자가형은 극형 중의 극형으로, 우리 식으로 따지면 부관참시나 능지처참에 해당할 법한 형벌이다.
문헌에 의하면 십자가형이 언도되면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고 사형수는 먼저 모진 태형을 당한 뒤에, 십자가의 횡목(橫木)을 직접 지고 사형장까지 운반해야 했다고 한다. 하지만 태형 때문에 약해질 대로 약해져 횡목을 운반할 만한 힘이 없을 때는 아무나 강제로 뽑아 대신 횡목을 나르게 할 수 있었다.
사형장에는 이미 수직목(垂直木)이 세워져 있고 횡목을 날라 온 죄수는 손목과 발등에 못이 박혀 십자가에 달리게 된다. 손바닥이 아니라 손목에 못을 박는 이유는 손바닥이 몸무게를 못 이겨 찢어지는 바람에 사형수가 십자가에서 곤두박질치는 일을 막기 위해서다. 이는 세계를 정복한 로마군대가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서 개발된 KNOW -HOW가 있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물론, 십자가에 달린 죄수는 물론 극심한 고통을 겪는다. 그래서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려 몰약 (미라를 만들 때 쓰인 방부제)을 탄 포도주를 해면(스펀지)에 적셔 마시게 하는데, 약간의 마취 효과가 있었다고 문헌은 전한다.
십자가 죄수는 손목에 못을 박았으니 손목 동맥 파열에 따른 과다출혈로 숨을 거둔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대부분은 질식으로 숨졌다고 한다. 몸이 아래로 처지면 횡경막이 눌려 숨을 못 쉬게 되고, 못으로 고정된 발의 힘을 빌려 몸을 추스르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다가, 마침내 몸을 추스를 기운이 빠지면 호흡곤란으로 죽는 것이다. 그래도 죽지 않을 경우는 완전히 숨을 거두게 하기 위해 다리를 꺾어 버렸다. 발에 힘을 못 주게 하려는 조치이다. 잔인하다.
형리로 선발된 군인들은 사형수의 죽음을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할 의무가 있었으므로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가가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보았다. 만일 이때 조그만 신음 소리라도 들렸다면 여지없이 마지막 일격(다리 꺾기)을 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라 창에 찔린 곳에서 물과 피만 흘러나올 뿐이었다(요한 19, 32-34). 사람이 죽으면 피에서 물이 분리되기 시작한다고 한다.
십자가에 달린 죄수는 보통 하루 정도 버틴다고 한다. 역사적인 기록에 따르면 예수와 얼추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스파르타쿠스(기원전 73년에 검투사의 반란을 일으켰다)가 십자가에서 사흘을 버텼다고 한다. 말하자면 십자가에 달려 오래 버티기 부문의 기록 보유자인 셈이다. 스파르타쿠스 경우에는 검투사의 다부진 체력이 한몫 단단히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미처 세 시간을 못 버텼는데 아마 3년의 공생애(共生涯) 동안 영양 공급이 부실했기에 그만큼 몸이 약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로마제국에 반기를 든 정치범은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십자가 처형은 그 과정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끔찍한 공포감을 심어 주었기에 로마에 반기를 들 생각을 아예 못 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다. 바로 멜 깁슨이 영화에서 강력하게 부각시켰고 승부수로 삼은 부분이다. 히틀러가 유태인 대량학살로 반유태주의 의식을 나타내었다면 멜 깁슨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반유태주의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THE PASSION OF THE CHRIST」를 보면서 멜 깁슨이 이제까지 출연했던 영화들을 떠올려 보았다. 「매드 맥스」 시리즈, 「리셀 웨폰」 시리즈, 「브레이브 하트」, 「페트리어트」 등 대체로 완성도 높은 폭력성이 돋보이는 영화들이었다.
그런 경향을 미루어 볼 때 멜 깁슨이 예수가 당한 폭행을 가능한 한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 이해가 됐다. 물론 예수에게는 동정심을 갖게 만들려고 한 의도는 짐작된다. 피에 굶주린 악당들로 표현된 로마의 형리들이나 예수의 죽음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유태교 지도자들의 행태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관객들의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멜 깁슨은 영화를 만들면서 상당 수준의 자료를 수집하여 고증을 거친 것으로 판단된다. 우선 예수의 모국어인 아람어(히브리어의 사투리)와 로마의 행정용어인 라틴어를 사용하여 영화의 사실감을 높였다. 또한 십자가형의 과정에서도 사실감이 충분히 드러났다. 문헌에 의하면 로마의 형리들은 채찍 끝에 동물의 뼈나 납을 달아 사람의 몸에 채찍이 잘 감기도록 만들었는데 그 채찍질이 얼마나 모질었는지 열 대 정도 때리면 피부가 벗겨져 뼈가 드러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예수가 당했던 채찍질은 실제로도 매우 끔찍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도 그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장면이 여과없이 나타나 영화를 보는 내내 직접 당하는 것 이상의 고통을 느껴야 했다.
멜 깁슨은 <요한 복음>을 텍스트로 시나리오를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를 보고난 후 복음서(1952년 미국의 개정표준판(Revised Standard Version))를 자세하게 읽어보았다.
Then Pilate took Jesus and scourged him. And the soldiers plaited a crown of thorns, and put it on his head, and arrayed him in a purple robe; they came up to him, saying, "Hail, King of the Jews!" and struck him with their hands. (John 19, 1 ~ 3) 매질을 하고 면류관을 씌웠다는 표현이 나온다. 영화에서 '피 범벅'이 되도록 구타당하는 끔찍한 장면이 계속되는 것은 흥행을 노린 멜 깁슨의 연출에 힘입은 바가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토록 끔찍하게 당했다면(물론 그럴 수도 있다) 복음서의 저자들도 스승이 당한 엄청난 고통만큼 상세하게 묘사했을 것이다.
이제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다룬 영화는 많았다. 대충 떠오르는 작품만 해도 「왕중왕」(1961), 「위대한 생애」(1965), 「나자렛 예수」(1977), 「예수의 마지막 유혹」(1988)이 있는데 모두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와는 확연히 구별된다. 이전의 영화들은 대체로 예수의 일생을 다루면서 그의 가르침이나 사상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예수의 삶과 의미에 관한 깊은 성찰보다는 십자가형의 사실감을 표현하는 데만 치중한 덕분에 종교영화로서의 품위는 현격히 감소되었다. 영화가 끝난 후 남은 것은 오직 끔찍한 고통을 겪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연민의 감정뿐이었다. 하지만 고통 자체에 사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진정한 의미는 그 고통을 통해 창출되는 가치- <부활>에 있지 않을까? 그 진정한 가치는 보이지 않고 끔찍한 고통만 묘사된 잔인하기 짝이 없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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