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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朋滿座

모두가 무시하고 경멸했던 여성들의 이야기 『기지촌의 그늘을 넘어』

by 언덕에서 2010. 4. 19.

 

 

모두가 무시하고 경멸했던 여성들의 이야기『기지촌의 그늘을 넘어』

 

 

이 책의 저자 여지연은 서울에서 태어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 시카고에서 자랐으며 스탠퍼드 대학에서 인지과학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뒤 신문기자로 일했으며,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노스웨스턴 대학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아시아계 미국인 역사와 아시아 이민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중국, 일본, 미국에서 각각 소수 민족인 한국인을 비교 연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책은 지은이의 박사학위 논문을 보완하여 출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은이가 관심을 두는 연구는 인종, 민족성, 문화, 민족주의, 여성과 젠더, 기억과 역사적인 서사 그리고 정체성의 구성에 관한 것이다. 폭넓은 구술 인터뷰와 고문서 조사연구를 바탕으로 미군 기지촌에서 연상되는 매춘부터 미국으로 건너간 군인아내들이 다문화 가족 안에서 겪는 투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한국과 미국, 모두가 무시하고 경멸했던 여성들의 이야기

 

 1950년, 미국 시민의 아내가 된 최초의 한국 여성이 미국 땅에 발을 디뎠다. 그해 미국 땅에 도착한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십중팔구 그녀의 남편은 미군 병사였을 것이다. 1950년 이후로 거의 반세기 동안 십만 명에 가까운 한국 여성들이 미군과 결혼해 미국이라는 '꿈의 나라'로 이민을 갔다. 필자가 초등학교 다닐 때 이웃집에서 본 TV 드라마는 외국에 결혼이민가는 처녀들의 선망어린 이야기가 연속극으로 방송된 기억으로 남아있다.(주인공이 한혜숙이었던 걸로 분명히 기억한다) 지금은 동남아 처녀들이 선망어린 기대감으로 한국에 시집을 오고 있다.

 당시 한국 여성들은 미군들과 매년 지속적으로 결혼을 하고 있는데도, 최근까지 이들이 과연 누구인지 실제로 알고 있는 한국인이나 미국인은 거의 없었다.

 한국인들에게 그들은 미군과 결혼한 수상쩍은 여성들이었고, 한국과 미국 모두에서 ‘매춘’ 여성 또는 ‘양갈보’라는 비참한 이미지로 존재해 왔다. 그들의 존재는 거의 인정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역사는 주변화 되었다. 

<이범선의 소설을&nbsp; 영화화한 '오발탄' 포스터 : 주인공 철호 의 여동생 명숙은 먹고살기 위해 사회가 경멸하는 양공주를 택한다>

 

『기지촌의 그늘을 넘어』는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건너간 한국인 군인아내들에 대한 첫 심층 연구로서 그들의 삶과 자매애, 그리고 나름대로의 저항에 초점을 맞춘 책이다. 저자는 군인 아내 16명에 대한 심층면접과 150여 명의 군인 아내 및 그 가족들에 대한 참여관찰을 토대로 하여 한국인 군인 아내들이 미국 사회, 한국 사회, 지역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자존감과 한국인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외로운 노력이 필요했는지를 보여준다.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간 그들은 어떻게 살아왔을까?

 

 저자는 한국과 대부분의 다른 아시아 국가 전쟁신부들에게 ‘전쟁신부(war bride)’라는 용어는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대다수 한국 전쟁신부들은 군사적 갈등이 중지되었던 휴전 시기 동안, 말하자면 전쟁 상태가 아니라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에 병사였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그들의 결혼은 1945년 이후부터 남한에 미국 군대가 계속해서 주둔한 직접적인 결과였다. 이러한 이유로 지은이는 이 여성들을 ‘전쟁신부’가 아니라 ‘군인아내(military bride)’라 칭한다.

 미국으로 건너간 한국인 군인아내들 대다수는 한국과 미국 사회 모두로부터 소외당하고, 자신들의 친척은 물론 심지어 가족들에게조차 배척당하고 경멸을 받았다. 특히나 미국인들은 자기를 도와주었지만 단 한 명의 한국인도 그녀를 도와준 사람은 없었다는 사실에 상처 입고 슬퍼했던 한 여성의 이야기처럼, 미군과 결혼했다는 그들의 과거는 한국인들에게 오히려 더 많이 거부되었다.

 지은이에 따르면,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한국에 살든 미국에 살든 간에 미군과 결혼한 여성들을 기지촌에 연결시켜 생각한다. 군인아내들이 예전에 기지촌의 매춘 여성이었다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이 군인아내들이 반세기 동안 겪어온 배척과 차별, 그리고 노골적인 경멸에 주요한 원인을 제공했다.

<기지촌 주변인의 삶을 소재로 만든 김기덕 감독의 영화 '수취인 불명'의 한 장면 : 혼혈아인 창국의 엄마는 양공주 출신이다. 창국의 아버지인 미군 흑인에게 계속적으로 편지를 보내지만 그때마다 편지는 번번이 '수취인 불명' 도장이 찍힌 채 되돌아 온다>

 

 또한 한국인 군인아내들은 다른 문화로의 창구 역할을 함으로써 미국인들의 구미에 맞는 색다른 문화 경험을 제공할 것과, 지속적인 인종적․문화적 불평등을 편리하게 포장하는 미국의 다문화주의에 기여할 것을 요구받았다. 곧 종속적인 문화에 관한 미국의 우월성과 예외주의를 입증하는 데 이용되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미국인 남편과 시집 식구들, 나아가 미국 사회 전체가 이들에게 암묵적으로 요구한 ‘미국화’의 압력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이들은 언어와 인종, 그리고 계급의 장벽 앞에서 그냥 좌절하고 피해자 의식에만 젖어 있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운명과 사회적 편견에 맞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려 했다. 이들이 공동체를 형성한 계기는 지극히 단순한 충동, 즉 자신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또 다른 한국인을 만나고 싶다는 욕구에서 시작되었으나, 이들의 공동체는 점차 그들만의 독특한 네트워크로 발전했다. 이들은 국제 결혼한 한국인 미군아내라는 공통점을 바탕으로 자신들만의 단체를 형성했고, 이 단체를 통해 서로 필요한 도움을 주고받았으며, 비록 모두로부터 소외당할지라도 자신들은 분명 한국 여성이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지은이는, 군인아내들이 형성한 ‘상상의 공동체’는 자아 정체성에 대한 한국식과 미국식 정의 모두에 도전하는 것이라 강조한다.

<영화 '수취인 불명'의 한 장면: &nbsp;기치촌 동네에 사는 여고생 은옥은 자신의 눈을 고쳐준 미군병사와 결혼할 결심을 한다. 즉, 양공주가 아니다>

 

 군인 아내들은 미국 사회에서는 성애화(性愛化)되거나 순종적인 아내라는 아시아계 여성의 이미지 때문에 이방인 취급을 받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젠더화된 신제국주의 질서 하에서 완전한 미국인으로 동화될 것을 요구받는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는 미국인 남편이 군인이라는 것만으로도 그 여성의 과거를 짐작할 수 있다는 듯한 침묵을 견뎌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같은' 한국인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처럼 다른 한국인에게 도움을 줄 것을 요구받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각종 자료, 통계, 인터뷰 등을 통해서 그 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군인 아내들의 삶을 드러낸 저자의 성실한 태도, 그리고 군인 아내들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정형화하지 않는 연구 자세에 지지를 보내고 싶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군인 아내들이 모두 다 기지촌 성매매 여성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바람에 군인 아내 혹은 아시아계 여성의 여성적인 정체성을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한계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군인 아내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인'아내가 아니라 '한국인' 군인아내에 관한 이야기만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군대나 군사주의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책의 앞부분에서, 군인아내들이 실제로 기지촌 성매매 여성이었던지 아니었던지 상관없이 이 여성들이 기지촌과 미군기지 근처에서 왔다는 점과 "군대 매춘의 존재 그 자체가 한국 사회와 미군과 결혼한 한국 여성들의 삶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는 한다. 군인아내와 군인아내가 아닌 아시아계 여성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사실은 중요한 차이가 있을 수도 있지만 서구 중심적 시각에서는 별 차이 없이 재현될 수도 있는 이 여성들이 구별되는 바로 그 지점에 ‘군대’가 있다.

 

<영화 '수취인 불명'의 한 장면 : 김기덕의 모든 영화가 그렇듯이 뒷맛이 개운치 않은 영화다. 미국 식민지의 사생아의 슬픔을 탁월하게 그려냈다는 어느 영화평론가의 해설은 문제의 일면만 피상적으로 보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또한 기지촌 성매매 여성이었던 군인아내와 그렇지 않은 군인아내 사이의 다른 위치상을 간략하게 언급하고 이들 모두 한국인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반복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이 여성들을 단일한 범주로 설명하게 될 위험이 있다. 물론 저자는 여성들 스스로도 만들어내는 경계를 간과하지 않으며 그것들을 언급하지만, 그래도 그 맥락을 좀 더 세밀하게 드러낸다면 군인아내들의 이탈된 위치를 세밀하게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