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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朋滿座

끊임없는 분쟁과 테러『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

by 언덕에서 2010. 4. 13.

 

끊임없는 분쟁과 테러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 

 

 

 

이 책의 저자 다케나카 치하루(竹中千春, 1957 ~ )는 1957년 도쿄 출생으로 1979년 도쿄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한 후 같은 대학교 법학부 강사와 메이지학원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인도정치와 국제정치사를 전공으로 하고 있으며, 특히 간디와 비폭력주의, 내셔널리즘, 탈식민주의, 젠더 등에 많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현재 릿쿄대학교 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인 정치학자이다. 

 치하루는 일본의 전후 처리에 비판적인 견해를 지녔으며 활발한 시민운동을 펼치고 있다. 그녀가 쓴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는 인류에 있어 가장 끔찍한 살육의 행위인 전쟁의 실상을 구체적이고 생생히 들여다보며 왜 세계에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지, 그 배경엔 어떠한 역사적 뿌리가 존재하는지,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곳은 어디이며 이와 관계된 사람들은 누구인지, 전쟁을 비롯한 폭력의 전반을 막기 위해 우리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등의 내용을 차분하고 심도 깊은 어조로 다루고 있다. 큰 타이틀은 ‘전쟁’이지만 이 책의 논의는 국가 단위의 전쟁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역 간의 분쟁과 테러를 비롯한 모든 폭력행위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이 책은 거미줄처럼 무수히 얽힌 전쟁과 폭력의 복잡한 원인과 구조 및 현상을 누구든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세계와 나의 관계, 폭력과 일상의 연관성을 유기적으로 파헤치며 전쟁과 세계 각지에 만연한 폭력이 결코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 아님을 역설하는 것이다. 동시에 인간사에 있어 가장 잔인하고도 비극적인 폭력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평화에의 열망과 그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저자의 따뜻한 시각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고 있는가?

 

 2006년 유엔 보고서 집계 기준에 따르면, 1990년 이래 크고 작은 전쟁으로 인해 200만 명 이상의 어린이가 사망하고 400만 명의 어린이가 심한 부상을 입었다. 무력분쟁 사망자 중 90% 이상은 일반 시민이었으며, 이 가운데 80% 이상이 전쟁과는 무관한 여성과 어린이였다. 특히 2002 ~ 2006년에만 전 세계 어린이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42개 국가 약 15억 명의 아이들이 폭력적이고 강도 높은 분쟁 상황에 휘말렸으며, 현재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는 난민과 이재민은 그 수만 약 3,900만에 이른다. 전 세계적으로 매설된 소형지뢰의 수가 무려 2억 개 이상이라는 것과 매달 800명의 어린이가 이 지뢰를 밟고 죽거나 발목 등 신체 일부가 절단되고 있다는 대목에서는 설마하고 간직하던 한 줌 희망의 빛마저 사라지는 듯하다. 작은 예를 하나 들자면... 아프리카에 위치한 시에라리온의 경우 반군의 80% 이상이 18세 미만 소년병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통계화된 최소한의 수치일 뿐이다. 실상은 이보다 훨씬 더할 것이며 이보다 훨씬 끔찍할 것으로 보인다.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러한 의문을 가져보았을 것이다. 뉴스를 보면서, 신문을 펼치며, 책을 읽으며, 급기야는 인터넷에 떠도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무수한 영상들을 접하면서 묻는다. "왜 세상은 이 모양일까?" 그러나 그들은 오늘도 변함없이 전쟁 중이다. 한 치의 물러섬도 보이지 않는다. 포탄의 파편에 찢겨 나뒹구는 TV 화면 속 아이의 시체가 무색하리만큼. 세계 각지에서 발생하는 분쟁과 테러, 폭력의 현장은 ‘세계화시대’에 발맞춰 매일 우리집 거실까지 실시간으로 배달된다. 그러나 다툼은 일상화된 지 이미 오래이며, 우리는 폭력에 지극히 무감한 삶을 살고 있다. 그래도 가끔 남는 의문은 어쩔 수 없다.  "대체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 걸까?”

 이 책은 바로 인간사의 주요한 테마를 모두 담고 있는 이 한 가지 물음에서 출발하고 있다. 저자인 다케나카 교수는 이 책을 통해 국가 간에 벌어지는 전쟁 및 그보다 좀 더 지엽적인 분쟁과 테러 등을 포함한 폭력의 현상과 원인, 요소 전반을 설명함으로써, 폭력의 문화를 비폭력의 문화로 변화시키는 데 할애하고 있다.


분열하는 세계, 심화되는 폭력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보자. 왜 세계는 핏빛으로 점철된 오랜 비극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툼과 폭력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저자의 견해는 비교적 간단하다. 그녀는 주제를 보다 편리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간단한 이분법을 적용하고 있다. 즉 오늘날의 세계는‘안전하고 풍요로운 세계'와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로 심각한 분열 양상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 '안전하고 풍요로운 세계'란 합법적인 정부 아래에서 법과 질서가 지켜지고 시민이 시민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세계를 가리키며, 이와는 대조적으로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는 안정적인 질서가 존재하지 않으며 정부의 폭력적인 지배 아래 있든가, 정부가 없는 것과 같은 상태에서 무장조직이 힘을 발휘하는 사회로서, 사람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시민사회와는 거리가 먼 사회를 말한다. 이는 비단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이라는 단순한 도식에 국한된 분류는 아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엄연히 같은 나라, 같은 지역 안에서도 두 개의 세계가 분열되어 있으며, 시장경제체제가 성장해감에 따라 그 격차가 확대되고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서술하고 있다. 즉 대도시의 중산층 이상이 사는 주택가가 ‘안전하고 풍요로운 세계’로 대변된다면 그 반대쪽에는 저소득층이 거주하는 지역, 일반적으로 ‘슬럼’이라고 불리는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강남의 대치동에 위치한 고층아파트와 이웃한 슬레이트 지붕 판자촌의 우스꽝스러운 부조화를 떠올려보면 그림이 보다 명확해질 것이다.

 그리고 대척점에 위치한 이러한 두 세계의 충돌이야말로 폭력을 생산하는 가장 주된 요인이 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얼마 전 있었던 용산에서의 대참사를 생각해보면 된다. 이 분열 양상이 우리 사회를 비롯한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대립구도를 형성함으로써 무수한 폭력을 유발하고 있음을 감지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분열의 주요한 원인으로 저자는 두말할 나위 없이 무분별한 시장경제체제 논리와 불합리한 세계화를 지적하고 있다.

 

 

 

가난하지만 정신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며 산과 바다를 무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제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삶의 거점을 잃고 시장경제에 편입되었습니다. 그저 도시 슬럼가의 가난한 사람으로 전락해버린 것이지요. 힌두쿠시 산맥과 3천 미터 이상의 고원지대에서 유목민으로 평화롭게 살아가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미군의 폭격으로 삶의 기반이 파괴되자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는 것이 가장 극단적인 예입니다. 이들은 부자를 대변하는 자본주의나 자유주의 등에 도전할 만한 권력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의를 주장할 사상적인 무기를 상실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침묵을 지키며 현실을 참아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울분과 반목이 생겨 분쟁이 발생하기 쉬운 관계가 형성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분명히 그러한 긴장들로부터 폭력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슬람은 과연 공공의 적인가?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슬람 국가는 대부분 자원과 이데올로기,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강대국에 의해 철저히 이용당한 후 매몰차게 버려지는 사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이들 사회에는 반미, 반서구 정서가 극단적이고 광범위하게 퍼진 상태이며, 상황은 모두 다르지만 이들 모두가 이슬람성전인 지하드를 표방하고 있다. 안과 밖에서 폭력적인 요소가 계속 유입되는 까닭에 이 지역의 유혈사태는 끝을 모르고 계속되고 있다.

 

 

 

 좋든 싫든 이들 이슬람문화권의 분쟁이 9.11 테러 이후의 세계정세에 강한 영향을 끼쳤음은 자명하다. 이 책 역시 분량의 상당부분을 중동지역의 폭력 문제에 주목하고 있다. 이슬람 세력에 왜 반미, 반서구 정서가 광범위하게 들어서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연원을 하나하나 밝히며 이슬람 이해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많은 이들에게 “이슬람은 곧 위협세력이다”라는 편견을 심은 장본인인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 가르기’에 이의를 제기하고, 전 세계의 정세를 좌지우지하는 이른바 서구 제국들에 객관적이고도 엄정한 태도를 요구하는 저자의 시선은 객관적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미국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인데, 이 책에 정리·제시되어 있는 미국의 반복적 행동 패턴은 이슬람문화권에 뿌리 깊게 온존한 미국에 대한 증오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이나 달갑지 않은 것으로 다가온다.

 

 미국은 다음과 같은 개입과 철수의 패턴을 되풀이하며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를 양산해 왔다.

 첫째, 미국은 자신의 ‘적’을 봉쇄하기 위해 자신을 대신하여 전쟁을 벌일 국가나 무장세력을 지원한다.

 둘째, 미국의 군사원조를 받은 국가의 군대나 무장조직이 성장한다. 이들이 벌이는 전쟁이나 내전이 장기간 계속된다. 많은 무기가 유입되자 현지사회는 폭력화된다.

 셋째, ‘적’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면 미국은 동맹국에 대한 지원을 멈추고 손을 뗀다.

 넷째, 그렇지만 미국은 분쟁지역에서 평화를 만드는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미국이 지원을 멈춘 후, 전쟁과 내전 상태로 방치되어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가 만들어진다. 이런 패턴 중에서 이슬람세력은 미국의 ‘적’이자 최고의 ‘친구’이기도 했다. 미국은 이란의 이슬람혁명(이란혁명)을 무너뜨리기 위해 이슬람 인구가 많은 이라크를 이용했다. 또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소련군을 물리치기 위해 폭력적인 이슬람인 무자히딘을 지원했다.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히딘이나 오사마 빈 라덴, 이라크의 후세인 대통령은 모두 동일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다름아닌 미국이 만든 괴물들인 것이다. 미국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강대국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나라와의 약속보다는 자국의 상황에 따라 외교정책을 바꾼다. 결국 세계 각지의 운명은 미국 대통령선거의 결과에 따라 바뀌게 된다. 미국 국민이나 정부도 그토록 소동을 떨며 보도했던 이란혁명, 이란·이라크전쟁, 걸프전쟁, 아프가니스탄 내전 등을 쉽게 잊어버린다. 또 다른 문제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의 대외정책에 휘둘리다가 끝내 홀로 남겨진 분쟁지역의 사람들은 이를 결코 잊지 못한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직시해야만 문제의 핵심이 보이는 것이다.

 

 이는 비단 미국만의 이야기로 보아야 할 것인가? 이 책은 자국의 이익에 눈이 멀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이라는 엄청난 과오를 생산한 과거 영국의 이중성이나, 나치 독일에 의해 자행된 잔인한 폭력사례 등 제국이 범한 역사적 오류들을 되짚으며 현재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폭력에 대한 책임의 근원을 따져 묻고 있다. 그런 한편에 아프가니스탄이나 아프리카 등에 권리를 행사해온 강대국들의 이른바 ‘인도적 개입’이나 이라크전쟁의 명분인 ‘대테러전쟁’ 등에 내포된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며 ‘정의로운 전쟁’이란 결코 성립할 수 없는 명제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제 이슬람은 민주주의와 평화의 적이라는 난폭한 의견에 합리적으로 비판할 수 있나요? ‘모릅니다’라고 하며 도망쳐서는 안 됩니다. 이슬람 세계 중에서도 중심에 자리한 중동의 이라크에 군대를 파견한 국가의 시민이라면 특히 이런 질문에 명확히 대답할 의무가 있습니다.”

 저자의 뼈 있는 마지막 한 마디에 우리는 파병국가의 일원으로서 이라크와 나의 관계, 즉 전쟁과 폭력이 발생하고 있는 세계와 내가 살고 있는 일상의 관계를 잠시나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평화의 비전은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

 

 이제껏 살펴본 바대로 세계 각지는 과거에도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한 폭력행위로 호되게 신음 중이다. 이 책의 말미에 나오는 간디의 이야기를 보도록 하자.

 그때 간디는 영국 총독과 회담하기 위해 델리에 체류하고 있었다. '불가촉천민'이라고 불리는 사회의 최하층이 사는 거주지에 머물렀던 것이다. 폭동을 진정시키기 위해 달려간 캘커타에서도 간디는 단식으로 허약해진 몸으로 가난한 이슬람신도의 집에 머물렀다. 힌두교 대 이슬람교라는 종교적 대립을 벌이고 있는 두 집단에서 강한 인상의 젊은이들이 몰려 왔다. 그들은 간디 앞에서 무기를 버리고 평화를 맹세했다. 그 순간 몹시 흥분한 사내가 달려왔다.

 사내 : (이 빵을) 먹어요! 먹어! 난 지옥에 가지만, 당신은 죽으면 안 돼요!

 간디 : 지옥에 갈지 어떨지는 신만이 결정하는 일입니다.

 사내 : 난 사내아이를 죽였어요. 벽에 던져 머리를 박살냈다구요!

 간디 : 왜 그랬습니까?

 사내 : 그놈들이 내 아들을 죽였어요. 이슬람 놈들이 내 아들을 죽였으니까요!

 간디 : 오, 가엾은 자여! 지옥에 가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드리겠소. 아이 하나를 찾아내십시오. 부모가 살해당한 불쌍한 아이를. 아주 어린아이면 좋겠습니다. 그 아이를 당신의 아이로 키우십시오. 단 그 아이는 이슬람 아이여만 합니다. 이슬람으로 소중하게 키우면 됩니다.

 사내는 놀란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저자는 책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타인에게 연민을 느낀다면 다른 사람과 고통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안전과 위험 그리고 풍요로움과 가난함의 격차를 넘고, 국경을 넘어, 동료의식을 만들 수 있는지의 여부가 핵심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사회의 연쇄적인 폭력을 푸는 열쇠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하트마 간디의 손자인 라지모한 간디는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한 직후 일본의 한 신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기고했다. “테러가 다시 발생하리라는 공포 때문에 인류는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나 인류가 어둠 속의 햇살처럼 지금만큼 비폭력의 가치를 절실히 느낀 적은 없다. 빈부, 종교, 민족 등의 이유로 서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대화와 화해라는 다리를 놓자. 테러로 아버지를 잃은 뉴욕의 어린이와 전쟁으로 발을 잃은 아프가니스탄 어린이가 서로 마음이 통하느냐의 여부에 인류의 미래가 걸려 있다.” 타인의 고통을 나의 아픔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이런 ‘공유’의 힘이야말로 원자화된 개인을 끈끈한 연대감으로 결속시켜줄 것이다.

 전쟁터의 살얼음판을 걷는 불운한 이들 앞에 당장 달려갈 수는 없지만 때로 그들의 고통을 보며 함께 울어주는 것, 그 한 방울의 눈물이야말로 세상을 달라지게 할 가장 거대한 그 무엇임을 이 책은 넌지시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