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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철학서

위대한 지도자 『안창호 평전』

by 언덕에서 2010. 1. 9.

 

 

위대한 지도자 안창호 평전

 

 

 


이 책은 그동안 출간된 도산 안창호 선생에 관한 글 중에서 좋은 글들을 엄선하여 선생의 삶과 인격을 알려주는 평전이다. 도산의 말과 글과 삶을 통해 아직까지 도산의 모습을 모르는 많은 젊은이, 사람들에게 도산을 알리고 위대한 지도자의 불빛을 더욱 환하게 비춰줄 것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일제치하 우리 민족의 어두운 터널 속에서 하나의 빛을 비춰주고 서거하신 후에도 우리민족을 위해 아직도 그 빛을 비추고 계신 분이다.

 도산의 “진리(眞理)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正義)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으라.” 는 말 한 구절은 서거하신지 60여년이 지난 아직도 우리 젊은이, 우리 국민의 가슴속에 커다란 빛으로 비춰지고 있다. 거짓이 지배하는 세상. 거짓이 영리한 사람의, 하나의 삶의 방법이 되어 버린 세상에 도산의 이러한 말씀, 진실 마저 없었다면 우리는 나침반 없이 항해하는 영원히 잃어버린 삶을 살게 됐을지도 모른다. 도산은 말한다.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고 아무리 어려운 환경과 어려움을 맞이한 국민, 나라, 사람이라도 도산의 이러한 진실무망(眞實無妄)의 정신에 다시금 일어서 곧게 나아가는, 이루어내는 힘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항일 독립투사이며 민족 개화 운동의 선구자인 도산은 평남 강서(江西) 대동강 하류 도롱섬에서 농부 안흥국(安興國)의 3자로 출생했다. 7세 때 부친을 여의고 조부 밑에서 성장하여 서울 구세군 학당서 수학했다. 1896년 18세 때 [독립 협회] 평양 지회 결성식이 열린 평양 쾌재정에서 처녀연설을 하고, 1898년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였고 1900년 도미해 [공립협회(共立 協會)]를 창설, 1906년 귀국,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으며, 1907년에는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 정주(定州)에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설립하였고, 1909년 [청년학우회]를 조직, 무실역행(務實力行)의 민족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 재차 도미하여 1913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인재 양성 목적으로 민족 혁명 수양 단체인 [흥사단]을 조직, 독립 운동을 펴던 중, 3ㆍ1 운동 후 임시 정부 내무총장을 역임하였고, 1932년 윤봉길 의거 사건 후 체포되어 본국에 송환되었으며, 대전서 3년간 복역 중 가출옥, 1937년 [흥사단]의 자매기관인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돼 서대문 감옥에 다시 투옥되었고, 옥중에서 병을 얻어 12월 24일 병보석으로 경성제국대병원에 입원, 이듬해인 1938년 3월 10일 동 대학 병원서 폐병, 소화 불량으로 사망했다. 

 도산은 높은 지위의 위치도, 일본 침략자를 응징하는 혈사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직도 도산을 따르는 많은 국민, 젊은이가 도산의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기리고 있는가? 그것은 그의 인격이다. 인간은 많은 나약함과 무능함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높은 권세, 부를 가진 자도 결코 그자신의 행복과 자신의 만족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도산의 사상은 이를 이겨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진실의 힘이다. 진실은 그 무엇에도 두려워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아직도 도산의 말과 행동과 인격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우리 국민, 젊은이의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이다.

 도산은 사랑하기 공부로서 '정의돈수(情誼敦修)'를 강조한다. 이는 내가 접하는 사람들부터 사랑을 더욱 두텁게 한다는 뜻으로, '빙그레' 웃을 것을 강조하였다. 학생들이 쉽게 할 수 있는 사랑의 표현 방법으로는 다 정하게 이름 불러 주기, 먼저 인사하기, 손을 꼭 잡거나 포옹하기,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아낌없이 도와주기 등이 있다. 또한 항상 관심을 가지고 친절하게 또는 즐거운 표정으로 응대해야 할 것이며, 상대방의 약점을 들추어 내지 말고 장점을 찾아내어 그것을 칭찬해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외에도 특별한 기념일(생일)을 축하해 주거나, 마음의 편지를 쓰는 것도 있다.

 

 

 

 

 [도산사상연구회] 회장이었던 고 김태길 교수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도산은 단순한 정치가나 교육자가 아니라 군사, 외교, 산업, 도덕 등 여러 분야에 두루 관심을 기울였던 종합적인 사상가이며, 이 같은 폭넓은 관심은 한국의 인간을 개조하고 국가를 다시 세우고자 하는 하나의 목표에 집결되어 있었다. 오늘날 한국인 가운데는 서구적인 합리주의 정신이 몸에 밴 사람들이 적지 않으며 한편으로는 현실의 부조리를 척결하기 위해 목숨을 내걸고 싸울 수 있는 뜨거운 정열을 가진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두 가지 성격을 조화시킨 도산의 인간상은 오늘의 현실에서 크게 귀감이 되고 있다.”

 도산이 1919년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했을 때 주변의 만류를 무릅쓰고 자기 대신 이승만을 앞세웠던 것은 그가 사리사욕을 초월한 정치인이었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정권에 대한 욕심이나 자신의 영달을 위해 뛰어 다니는 오늘날 정치인들에게 도산 정신은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