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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朋滿座

이어령 수필집 『저 물레에서 운명의 실이』

by 언덕에서 2009. 12. 22.

 

 

 

이어령 수필집 저 물레에서 운명의 실이

 

 

 

 

여성이란 무엇일까? 여권이 신장됨에 따라 페미니즘에 대한 연구가 도처에 활발하다. 페미니즘 논의를 새삼 화제에 올리는 것이 구시대적이라는 느낌이 들 만큼 페미니즘은 이미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고, 연구의 한복판에 놓여 있는 진행형의 문제다. 실제로, 남성의 권위를 내세운다거나, 여성비하적인 발언을 일삼는 남자는 자신의 미성숙을 인정하는 꼴이 돼버리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 책은 여성에 대한 인식이 변화된 2009년에 조금은 생소하게 느껴지는 ‘1960년대의 여성론’이다. 내가 대학생이던 1980년대에 읽었던 책이나 당시에는 20년전인 1960년대의 고풍스런 구식의 느낌이 들지 않았다. 지금 20대 젊은이들이 읽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 여성의 본질은 크게 변하지 않으니까. 이어령의 《저 물레에서 운명의 실이》는 그가 1960년대 당시에 썼던 여성론이다. 크게 여성 본성을 분석한 글, 성숙한 여성으로 거듭나기 위한 조언의 글, 한국 고전에 나타난 여성을 분석한 글 세 가지로 이 책은 구성되어 있다.

 

 

 무엇인가에 의존해서만 생명의 잎과 그 꽃을 피울 수 있는 덩굴심리를 여성 본성에 비유하고 있다. 속보다는 의상에 더 집념하는, 즉 인간의 본질보다 그 형식에 더 관심이 많은 여성 심리. 수치심이나 감상성, 나약성으로 상징되는 여성적 특질. 가장 여성다운 여성이란 바로 참고 견디는 ‘기다림의 여인상’……. 등등의 나열은 이어령이 파악한 여성의 본성이다. 지금의 급변화된 여성관에 자못 어긋나는, 페미니스트 앞에서 얘기하다간 얼굴 붉히며 싸우기 십상인 글이 제1장를 이루고 있다. 현실에 적용이 안될 수도 있으니 참고로만 읽어두자. 다양한 세계관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니겠는가? 윤복희의 미니스커트 복장이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자유부인》이 여성의 성 해방문제와 얽혀 센세이셔널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시대에 쓴 글이기 때문에 지금 읽으면 격세지감이 있을 거라고 이어령은 자조한다. 그러면서도 “글을 수정하지 않고 출간 당시 그대로 발표한 까닭은 한국의 페미니즘이 걸어온 작은 마일스톤으로 남겨두고 싶기 때문”이라고 저자 서문에서 밝혔다.

 

 

 

 한국 고전에 나타나는 여인상에 대한 글에서는 한 명의 여인을 분석하며 그 정신상을 한국 여인뿐만이 아닌 한국인 전체의 정신으로 확대하여 해석한다. 고전 분석에서 나타나는, 치열하게 파고드는 이어령의 관찰은 이미 상투적 의미로 각인된 사실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 내는 재미를 제공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심청은 대를 이을 자식이 없는 것만큼 불효가 없다는 심 봉사의 생각 때문에, 즉 효 사상 때문에 세상에 태어나고,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야 한다는 효를 위해서 죽음의 문턱에 이르는 여인이다. 이야기의 초점이 효 사상에 모아지는 심청의 이야기에서 이어령은 효의 의미를 여성과 한국인 심리로 확대하여 심층 분석한다. ‘효를 행한다’는 것은 부모를 위해 자신의 욕망을 억압하는 것이고, 이는 자기 거부의 의지이라고 한다. 심청의 전 존재 - 부모에게 사랑받을 어린 나이에 구걸을 하여 심 봉사를 먹여 살리는 것이나 심 봉사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것 등 - 는 기실 심 봉사의 눈으로 환원되려는 퇴행에의 열정으로 나타나 있을 뿐, 독립된 개체가 아니다. 이는 다시 말해 효란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전의 혈육, 자기보다 앞서는 상고의 전통에 자기 몸을 바치는 정신인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 사상가이자 세계적으로도 추앙받는 효 사상에서 이러한 효 문화의 들춰보지 못한 이면을 발견해 낸 이어령의 식견에 몇 번 감탄할 것이다. 전통 사상에 입각한 한국 여인, 나아가 한국인 전체에 대한 독특한 고전 분석은 《춘향전》과 《사씨남정기》, 《이춘풍전》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지구의 반은 여성이다. 여성을 알기 위해 꼭 읽어두어야 할 고전적인 좋은 텍스트북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