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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철학서

붉은 로자 『로자 룩셈베르크 평전(Rosa Luxemburg)』

by 언덕에서 2009. 12. 18.

 

 

붉은 로자 로자 룩셈베르크 평전(Rosa Luxemburg)

 

 

 

 

프랑스 사학자 막스 갈로(Max Gallo, 1932~2017)의 저서로 2002년 간행되었다. 저자는 파리대학 역사학 교수, <렉스프레스>지의 논설주간, 장관, 하원의원 등을 역임하고 지금은 글쓰는 일에 전념하고 있는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이다.

 체 게바라, 마르크스, 레닌, 모택동 등 역사를 통틀어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혁명가는 많았다. 그중에는 권력까지 쟁취한 '성공한' 혁명가도 있었고, 설령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켰던 '진정한' 혁명가도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폴란드인으로서 유대인 출신에, 절름발이였고, 그래서 여러 측면에서 무시당하고 테두리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여자였다. 때문에 다른 누구보다도 훨씬 더 생생하게 인간 조건을 모순 관계 속에서 느꼈으며, 인간적인 약점과 인간이라는 존재의 '찬란한 불행'을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세기가 저물고 새로운 천년이 시작된 오늘날, 수많은 우상들이 쓰러지고 소위 혁명가라고 불렸던 이들의 모든 동상들이 뒤엎어진 지금, 왜 로자 룩셈부르크만은 여전히 우리의 가슴 속에 살아남아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겠다.

 

 

 

 그리하여 저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역사를 움직인 인물이 어떻게 기능했는가에 관심이 있다. 그가 잘했는가, 못했는가를 말하려는 건 아니다. 한 인물에 대한 판단은 독자에게 맡겨두어야 한다. 독자가 선택하는 것이다. 나는 특정 인물이 어떤 행동을 하도록 만든 메커니즘을 밝혀내고자 한다. 그의 머리 속에 무엇이 어떻게 작동했는가를 이해하려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어떻게 운명을 피해갔는가도 밝혀내고 싶었다."

 

 

 막스 갈로1가 생생하게 그려낸 유럽의 대표적인 좌파 혁명가의 전기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역시 역사를 움직인 인간들과, 그들을 추동시킨 역사의 메커니즘을 밝혀내는 그의 기본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막스 갈로는 방대한 시각과 통찰력으로 유년기에서 최후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로자의 삶과 사상과 행동을 꼼꼼하게 그려내는 동시에, 로자가 살았던 시대를 정밀하게 포착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애증이 교차한 연인이며 혁명의 동지인 레오 요기헤스와의 관계, 평생토록 친교를 맺었던 루이제 카우츠키나 클라라 체트킨과의 우정, 그리고 수정주의자 베른슈타인2과의 이념 논쟁, 카를 카우츠키3와의 친교와 갈등, 레닌과의 교류와 비판 등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는가 하면, 로자와 동시대를 살았고 유럽 전지역에서 거의 동시에 출현해서 활약했던 걸출한 사회주의 혁명가들-장 조레스(프랑스), 카를 카우츠키, 카를 리프크네히트, 베른슈타인, 프란츠 메링, 아우구스트 베벨(독일), 레닌, 플레하노프, 악셀로드, 베라 자술리치, 파르부스, 마르토프, 트로츠키, 스탈린(러시아), 마르흘레브스키, 다진스키, 카를 라데크(폴란드), 빅토르 아들러(오스트리아), 카미유 위스망스(벨기에)-의 면면이 생생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사회주의 혁명 운동이 절정기를 구가하면서 러시아 혁명으로 귀착되는 그 격동의 시대를, 서구와 동구를 포괄하는 전유럽적인 시각에서 읽고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폴란드사회민주당과 독일 공산당의 전신인 스파르타쿠스단을 설립한 핵심 인물 로자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주의를 인간 본위로 해석하고 국제사회주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민주주의와 대중혁명 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1919년 1월 스파르타쿠스 폭동 때 이른바 의용군에게 체포된 룩셈부르크는 심한 욕설과 함께 개머리판에 가격당하고 살해되었고 시체는 운하 속으로 던져져 1919년 5월 31일까지 그 속에 잠겨 썩고 있었다.

 이러한 박해와 암살은 그녀의 동지들이었던 카를 리프크네히트, 레오 요기헤스, 후고 하세, 쿠르트 아이즈너 등에게도 가해진 일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시신은 사망한 지 90년 만에 베를린의 한 지하실에서 발견되었다.

 그래서 기존의 로자 룩셈부르크의 묘가 엉뚱한 사람의 묘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논란에 휩싸여 있다. 

 중산층 유대 가정의 다섯 아이 가운데 막내로 태어난 룩셈부르크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하운동에 참여했으며, 당시 러시아 내에서 감옥생활을 한 많은 급진론자들의 경우처럼 스위스 취리히로 이주했고 법률학과 정치경제학을 전공하여 1878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민족적 개념은 룩셈부르크의 주된 관심 대상이었다. 그녀에게 민족주의나 민족의 독립이란 계급의 적인 부르주아지를 용인하는 시대역행적인 착오였다. 그녀는 민족적 야심을 항상 과소평가했으며 그 대신에 국제사회주의를 옹호했는데, 이러한 관점은 레닌의 민족자결주의 이론과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베른슈타인 비판은 카를 카우츠키와 공동 노선을 취하면서도 카우츠키와는 또 다른 미묘한 차이를 보였다. 베른슈타인은 자본 집중과 집적, 독점화가 나타나지만, 동시에 주식회사라는 독특한 조직이 부의 분산화 현상에 기여한다는 것에 주목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나타나게 된다고 보았다(현대 이런 모습들이다).

 룩셈부르크와 카우츠키는 기존의 마르크시즘을 옹호하면서 자본주의의 생명력에 대해 설명해야 했다. 엄연히 실제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이었던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카우츠키는 과소 소비론을, 룩셈부르크는 자본 축적론을 주장하였다. 이 이론들은 당시 자본주의 국가들의 세계 팽창과 자본주의의 생명력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고자 한 이론들이었다.

 룩셈부르크의 자본축적론은 자본주의가 현 단계에서 생존해 나가면서도 궁극적으로는 몰락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시코자 한 이론이다. 그에게 자본주의는 폐쇄적인 경제체제로 끊임없는 억압과 착취를 통해 잉여를 창출하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는 것이었다.

 잉여 자본을 투자하고, 확대 재생산할 수 있게 하는 요인은 전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 흡수, 통합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생명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다. 결국 언젠가는 자본주의가 흡수 통합할 전자본주의적 세계가 남아있지 않게 되면 자본주의는 더 이상 확대재생산할 수 없기에 자본주의는 붕괴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전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식민지를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비록 사민당이 카우츠키의 이론을 공식 당론으로 선택했지만, 당 내부는 이미 베른슈타인의 이론에 쏠리는 중이었다. 베른슈타인은 공식 석상에서는 논쟁에 패했지만, 실제로 당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노선을 걷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 룩셈부르크가 독일공산당을 창당한 것도 이러한 배경들이 쌓이고 쌓인 때문이었다.

 

 

 

 

 이 책에서 막스 갈로는 로자가 경험했던 사랑의 아픔, 그녀가 껴안았던 인간적 고뇌들을 진솔하게 드러냄으로써 자칫 딱딱하고 건조해지기 쉬운 이야기 속에서 읽는 재미를 부여하고 있다. 또한 예술과 자연에 대한 사랑을 미시적으로 포착해내면서 그녀의 사상이 결코 휴머니즘이나 자유와 괴리된 것이 아니었음을 강조하였다. 이를 통해 막스 갈로는 '붉은 로자'의 삶은 결코 무자비한 권력 장악이 아닌, 인류의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위한 것이었음을 역설하였다. 아울러 우리가 경험한 세기의 전환, 아니 밀레니엄 전환의 시점에서 로자가 1세기 전에 겪었던 모순들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고 있다.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데도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방어할 힘도 없는 가엾은 사람을 뭉개버리는 인간들은 누구든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천재적인 지성과 순결하고 고매한 정신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여류 혁명가, 열정으로 똘똘 뭉친 여류 혁명가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더욱이 지금은 그녀가 믿었던 마르크스주의, 혁명,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같은 말들이나 사상들은 먼지처럼 흩날릴 뿐이고, 그녀가 거부했던 자본주의, 민족주의는 여전히 기세를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가 저물고 새로운 천년이 시작된 오늘날, 한계를 넘나든 로자의 삶은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해, '우리는 무엇이 되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그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해 해답을 제시한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삶의 모든 양상을 껴안으려는 의지를, 자기 개성의 모든 잠재성을 표출하려는 의지를, 그리고 무엇보다 '혁명'보다 '인간'을 위해 살고자 하는 의지를 죽는 순간까지 치열하게 관철했던 진정한 혁명가였다는 것이 이 책을 읽은 후의 정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원의 끝자락에서 나는 한결 더 편안함을 느낀다... 당 대회에서보다도... 그럼에도 나는 거리의 전투나 감옥에 있는 나의 자리에서 죽기를 소망한다."- 로자 룩셈부르크, 1918.

 로자는 고뇌하는 가슴으로 단호하게 우리 삶의 모든 오솔길들을 탐색했고, 세상의 온갖 부조리함에 대한 탈출구를 찾았으며, 비열함, 복종, 체념, 불평등, 불의를 거부하는 운명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혁명과 전쟁의 시대를 불꽃처럼 살아간 로자에게서 우리는 전쟁보다 더 막막한 소외의 시대를 이겨내는 꼿꼿한 정신과 삶과 인간에 대한 결코 고갈되지 않는 열정을 만나볼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돌아가야 하는, 사라진 지 반백 년의 세월이 훨씬 지난 지금 우리가 다시 로자를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1. 막스 갈로Max Gallo는 역사학자이자 소설가, 에세이스트로 전기, 평전, 소설 등 90권 이상의 저서를 펴낸 대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큰 성공을 거두어(『나폴레옹』 한 작품만 프랑스에서 80만 부 이상 팔렸다!) 프랑스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통한다. 그는 1932년 니스에서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고, 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에게 점령당했다가 해방된 이 도시에서 온갖 사건을 목격하며 아주 일찍부터 세계에 눈을 떴다. 이때의 체험은 그의 상상력을 일깨우고 역사에 대한 열렬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그는 오랫동안 니스의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가르치다 1968년 파리 정치학 연구소의 교수가 된다. [본문으로]
  2. (1850 ~ 1932)독일의 정치이론가·역사가.자본주의 체제의 임박한 붕괴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와 같은 마르크스주의 정론에 비판을 가한 최초의 사회주의자로 알려졌다. 탁월한 이론가는 아니었지만 개인이 혁신의 주체가 되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민주주의를 제의함으로써 '수정주의의 아버지'로 일컬어지고 있다. [본문으로]
  3. (1854 ~ 1934)마르크스주의 이론가,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자. 그는 빈대학교 재학시절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에 입당했다. 1880년 취리히로 이주하여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고, 정치이론가인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1850~1932)의 영향을 받았다. 런던에서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알게 되어 1895년 엥겔스가 사망할 때까지 절친한 교우관계를 유지했다. 1883년 카우츠키는 마르크스주의적 평론지인 〈새 시대 Neue Zeit〉를 창간했고, 1917년까지 취리히·런던·베를린·빈 등지에서 이 잡지를 계속 발행했다. 1891년에는 독일 사회민주당이 채택한 에르푸르트 강령을 입안했다. 그러나 이후 이 강령은 비변증법적이며 의사과학적(擬似科學的)인 일종의 진화론을 당에 제공했다는 이유로 베른슈타인과 레닌의 비판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카우츠키는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대가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반전을 주장하는 소수파인 독립사회민주당에 가담했다. 1917년 러시아의 10월혁명 이후에는 폭력혁명과 소수 사회주의자에 의한 독재에 반대했고, 이로써 그와 다수파인 사회민주당과의 관계는 더욱 소원해졌다. 그는 독일 혁명가들에게 좌익적이고 과격한 성향으로 이탈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많은 독립사회민주당원들은 스스로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러나 독일 사회민주당의 다수파와 소수파 계파들은 그의 오랜 노력으로 다시 통합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