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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철학서

장 코르미에 『체 게바라 평전 』

by 언덕에서 2009. 12. 11.

 

장 코르미에 체 게바라 평전

 

 

 

프랑스 일간지 <파르지앵>의 전문기자 장 코르미에가 엮은 체 게바라 평전이다. 코르미에는 1981년부터 수집한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체 게바라의 삶을 가까이에서 그러나 전체적으로 조망했다. 게바라에 대한 다양한 인터뷰, 게바라가 쓴 편지글 등 게바라에 대한 자료를 집대성한 이 책은 프랑스에서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아르헨티나의 의학도였던 체 게바라는 남미여행을 통해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이 세계의 모순을 먼저 치료하는 것이 더 본질적인 문제라 판단하고 쿠바, 콩고, 볼리비아 등지의 사회주의 혁명에 투신한다. 파란의 삶을 살다간 게바라의 생애와 사상을 사진과 함께 엮어져 있다. 장 코르미에가 지은 이 책 외에도 국내에서는 유현숙이 지은 체게바라 평전이 있으나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928년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의 한 중류 가정에서 태어난 체 게바라(애르네스토 게바라데 라 세르나)는 20대 초반까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시 의학을 공부한 엘리트였다. 하지만 두 번에 걸친 남미여행을 통해 가난한 민중들의 삶을 지켜본 게바라는 빈곤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무엇인가 혁명적인 것 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이 세계의 모순을 먼저 치료하는 것이 더 본질적인 문제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1953년 과테말라로 간 그는 과테말라의 진보정당이 미국이 지원한 쿠데타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미국이 진보적 정부를 반대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멕시코로 간 게바라는 1956년 7월 카스트로 형제를 만나면서 구체적인 쿠바혁명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 해 11월 쿠바에 상륙, 시에라마애스트라 산맥을 중심으로 게릴라 활동을 벌이며 혁명군을 모은다. 1958년 산타클라라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승기를 잡은 카스트로와 게바라는 1959년 1월 결국 수도 아바나에 입성한다.

 그 뒤 게바라는 쿠바 정부에서 국립은행 총재, 공업장관 등을 역임했고, 공산권과 제3세계를 돌며 모든 종류의 제국주의, 식민지주의에 반대하는 외교활동을 벌인다. 이때부터 검은 베레모와 구겨진 군복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그러나 1965년 4월 쿠바에서의 2인자 자리를 버리고 당시 내전중이던 아프리카 콩고로 가 콩고혁명을 위해 노력했다. 1년 뒤 게바라는 볼리비아로 숨어들어갔다. 볼리비아는 남미 5개국과 집경을 이루는 요충지로서 남미의 정중앙에 위치한 국가이다. 이곳에서의 활동이 혁명의 불씨를 전남미로 확산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볼리비아 정부군을 지원하는 한편 CIA 요원을 파견, 게바라를 체포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고, 결국 게바라는 1967년 10윌 8일 체포된 뒤 그자리에서 즉결 처형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볼리비아 군당국의 마지막 조사를 받는 체 게바라. 총살 직전의 모습으로 알려져 있다.


 체 게바라의 인간적, 역사적 가치는 그는 쿠바에서 많은 일들을 했음에도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났다는 것이다. 즉, 1965년 4월부터 쿠바를 벗어나 볼리비아로 투쟁무대를 옮겨 바리엔토스 정권을 상대로 게릴라전으로 투쟁했으나, 1967년 10월 9일 미국이 가담한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잡혀 총살당했다. 1950년대에 그가 공부를 마치기 전에 다닌 여행이야기가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라는 영화로 2004년에 출시된 바가 있다.

 그에게 오토바이 여행은 관광이나 배낭여행이 아닌, 억압받고 가난한 그리고 한센병으로 고통받는 인디오들과 민중들의 아픔을 이해하는 기회였다. 물론 여행에서 쌓은 경험이 사회주의 혁명의식의 뿌리가 되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좌가 옳으냐 우가 옳으냐로 서로 물고 뭉개는 현재의 한국사회를 보며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 속으로 걸어들어간 게바라의 삶을 관찰해보는 것은 대단히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