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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박태원 단편소설 『피로(疲勞)』

by 언덕에서 2009. 11. 28.

 

박태원 단편소설 『피로(疲勞)』

 

  

월북작가 박태원(朴泰遠, 1909∼1986)의 단편소설로 19335[여명] 1권에 발표되었다.

어느 반일(半日)의 기록(記錄)’이라는 부제(副題)가 말해 주듯 서술자인 소설가 ''의 반일간(半日間)의 생활을 서술하고 있다. 이 작품은 ''가 거리로 나와 돌아다니며 보고 듣고 느낀 점을 서술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초기작 <적멸>의 연장선상에 놓이지만, 현실을 매개로 다양한 연상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에서 후기 소설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의 소설에 있어 특기할 사항은문체와 표현기교에 있어서의 과감한 실험적 측면과또 시정 신변의 속물과 풍속세태를 파노라마식으로 묘사하는 소위 세태소설의 측면이다이러한 특징은 그가 예술파 작가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요건이다일제강점기 말에 발표한 <우맹(愚氓)> <골목 안> <성탄제등에도 비슷한 경향을 잘 드러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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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구보 박태원(朴泰遠, 1909-1986)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는 다방 안에서 글을 쓰다가, 창틀에 매달려 안을 엿보는 소년을 발견하고 상념에 빠진다. 그러다가 앞에 앉은 서너 명의 청년들이 조선 문단의 침체를 비판하는 것을 듣고는 거리로 나온다.

 그들은 춘원과 이기영 그리고 백구와 노산 시조집을 들먹이며 온갖 문인들을 통매(通罵)하고 있었다. M신문사 앞에 이른 ''는 누구를 만나보고 갈까 망설이다가 수부 앞에 놓인 면회인 명부에 여러 가지 기록해야 될 것을 생각하고는 돌아선다. D신문사 앞에 이르러서는 문을 밀고 들어가려다가 시계를 보고 전화를 걸기로 한다.

 그러나 ''가 찾는 편집국장은 자리에 없었다. 사내(社內)에는 있지만 자리에는 없다는 편집국장의 행방불명을 생각하며 거리로 나와 배회한다. 버스를 타고 노량진으로 향하지만, 노량진에 볼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버스 안의 사람들과 거리의 사람들을 보며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기면서 암담한 현실과 인생의 피곤함을 절감한다. 한강의 삭막한 겨울 풍경을 보며 우울해진다. 한강 다리를 놓아두고 다리 밑 얼음 위로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보며 또 다른 것을 연상한다.

 다시 낙랑 다방으로 돌아와 엔리코 카루소의 엘레지를 들으며 미완성인 원고를 생각한다.

 

박태원 글, 이상 그림, 신문 연재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삽화, ≪조선중앙일보≫, 1934.8.1-9.19

 

 

 이 작품은 고현학(考現學.modemologe: 현대적 일상 생활의 풍속을 면밀히 조사, 탐구하는 행위)의 창작 방법을 통해 심리소설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은 이듬해에 발표된 그의 대표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원형이 된다. 전체적인 내용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마찬가지로 소설가의 일상적인 하루의 일과이다.

 이 소설 속의 '''구보'와 마찬가지로 허구화된 인물이라기보다는 작가 자신으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 역시 박태원의 자전적(自傳的)인 요소가 농후하다. 이 소설의 배경이 박태원과 이상(李箱)이 즐겨 찾던 다방 '낙랑'이고, 주인공인 ''가 현대 예술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보이는 소설가로 설정된 것은 모두 자전적인 요소와 직결된다.

 

 

 작품 속에서 '나'의 행위는 다방에서 나와서 거리를 걷다가 신문사에 들르고 버스를 타고 한강까지 갔다가 다시 다방으로 돌아오는 것, 즉 거리에서의 배회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배회는 철저히 무의지에 근거하는 것이며, 이러한 배회를 통해 '나'가 인식하는 현실은 '피로'일 뿐이다.

 다방 안, 거리, 버스 안 그리고 한강에서 느끼는 ''의 정서는 '피곤함'의 연속이다. 그 피곤함의 원인이 작품 속에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작품의 끝 부분에 이르면 ''의 암울하고 피곤한 심사가 식민지 현실이라는 당시의 보편적 상황과 직결되어 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게 한다.

 또한, 이 작품에서 특이한 것은 서사성이 약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박태원의 초기 소설은 특별한 사건을 중심으로 한 갈등과 인과적인 사건 전개가 약화되는 반면, 작중 인물의 내면세계에 대한 섬세한 반응과 묘사가 강화되어 있다. 구체적인 사건 없이 인물의 내면 의식 탐구에 주력함으로써, 서사성이나 사건의 추이를 중요한 특징으로 하는 전통적인 소설에서 벗어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