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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이효석 단편소설 『노령근해(露領近海)』

by 언덕에서 2009. 11. 26.

 

이효석 단편소설 『노령근해(露領近海)』 

 

 

이효석(李孝石, 1907∼1942)이 지은 단편소설로 1930년 1월 [대중공론] 지에 발표되었다. 또한 1931년 [동지사(同志社)]에서 같은 제목으로 출간한 그의 첫 단편집에 <도시와 유령><기우(奇遇)><행진곡><추억><상륙><북국사신(北國私信)><북국점경(北國點景)> 등의 단편과 함께 수록되었다..

『노령근해』는 그의 초기 소설의 특징으로 불리는 동반작가라는 명성과 결부되는, 하나의 대명사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 작품은 <상륙>과 <북국사신>과 함께 연작 형식을 취한 것으로 그의 초기 대표작으로 거론된다. 이효석의 초기 동반 작가적 성향을 드러낸 작품으로 <상륙><북국사신>과 더불어 흔히 3부작으로 일컬어진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동해안의 마지막 항구를 떠나 '부자도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고 다같이 살기 좋은' 나라인 북국, 즉 러시아를 향해 가는 배의 살롱 뒤 갑판에서 2명의 선객, 대모테 쓴 한국 사람과 코 높은 '러시아 인(러시아 사람)'이 조선말 아닌 다른 말로 은밀히 의논을 하고 있다. 이들은 정신없이 이야기를 하다가도 흘낏흘낏 살롱 쪽을 되돌아본다. 어디든지 쫓아오지 않는 곳이 없는 ××를 조심하고 있는 것이다.

 살롱 안의 흰 탁자 위에는 고기와 과일접시가 수없이 놓여 있고, 술병과 유리잔이 쉴 새 없이 돌아다닌다. 대개가 상인인 일등 선객들은 국경선을 넘어서 외지에 들어오면 으레 진탕 마시고 얼근히 취하는 것이 습관이다. ××의 친구도 한편 구석에서 '서의 명령이니 쫓아만 오면 그만이지, 바득바득 애쓰며 직무를 다할 것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어떻게 하면 배를 좀 불려 볼까 하는 궁리에 취해 있다. 유쾌한 취흥과 생각에 이들은 한껏 즐겁다.

 살롱이 선경(仙境)이라면, 갑판 아래에 있는 기관실은 지옥의 세계이다. 기관실에서 일하는 화부(火夫)들의 고역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기만 하다. 기관실 석탄고 속에 숨어 있는 밀항 청년은 살롱 보이가 몰래 가져다주는 음식으로 겨우 지탱해나간다. 삼등 선실에는 돈벌러 가는 사람, 객사한 아들의 뼈를 추리러 가는 불쌍한 어머니, 돈벌이 좋은 항구를 찾아가는 여인, 러시아어 회화를 외우고 있는 청년 등 북국에 대한 꿈과 동경에 차 있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소설가 이효석(李孝石,&nbsp; 1907&sim;1942)

 

 

 이 작품에는 일정한 주인공과 뚜렷한 이야기나 사건 없이 서술자의 눈에 비친 배 안의 정경만이 묘사되어 있다. 이국에 대한 강한 동경과 빈부의 차에 대한 폭로 등 이효석 초기소설의 면모를 잘 드러내고 있으나, 작품의 구성이라든가 인물에 대한 필연적 동기 설정 등이 모호해 단편소설로서의 완성도는 그리 높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의 서술은 3인칭 전지적 시점에 의하여, 마지막 항구를 떠나 연해주에 있는 소비에트 러시아로 향하는 국제여객선을 배경으로 하여 각양각색의 인생축도를 조명한다. 거기에는 고기와 과일과 향기로운 술로 배를 채우며, 주권(株券)과 미두(米豆) 이야기로 흥취에 젖은 일등실의 상인들이 있고, 사냥개 마냥 냄새를 맡으며 두리번대는 일본 경찰의 고등계형사도 있다. 갑판 아래 어두운 기관실에서는 적도의 무더위를 무색하게 하는 용광로 같은 아궁이 앞에서 녹초가 되도록 혹사당하는 화부의 동물적 정경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 옆 석탄 창고 속에는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간신히 숨어서 국외로 탈출을 시도하는 젊은 항일투사가 숨어 있다. 삼등 선실에는 돈을 많이 벌겠다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일터를 찾아가는 자, 아들의 뼈라도 추리러 간다는 노파,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떠나는 항구의 창녀, 러시아어 단어장을 들고 노상 중얼거리는 청년, 배웅하는 자 없이 떠나면서 어쩌면 이것이 조국과의 마지막 이별일지도 모른다는 감상으로 눈물에 젖어 있는 처녀 등이 등장한다.

 이 모두의 ‘부자도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는 다같이 살기 좋은 나라’를 찾아 고달프게 항해하는 자들이다. 석탄 창고 속에 숨어서 밀항을 꾀하던 청년이 살롱의 급사인 김 군의 도움으로 드디어 ‘꿈에 그리던 그 나라’로 상륙하여 거기서 기다리기로 한 로만 박과 접선하는 데 성공하는 과정이 <상륙>에서 다루어진다.

 신흥 국가 소비에트에서 일어났던 ‘그’의 사생활의 일부를 <북국사신>에서 계속 취급한 것을 감안한다면 『노령근해』의 주인공도 석탄 창고 속의 청년 ‘그’임에 틀림없으나, 이 작품만 볼 때에는 특정한 주인공이 설정되어 있지 않다. 카메라의 초점을 여기저기에 갖다 비추는 몽타주식 수법에 의한 정황이나 분위기의 설정은 장편소설의 제시부(exposition)와 같은 인상을 준다.

 의도적으로 설정된 일등 선실의 부르주아적 유산계급의 흥청댐과, 삼등 선실 프롤레타리아들의 밑바닥 인생과의 대조적 정황설정은 당대 삶의 축도를 상징적으로 묘사하려고 했다손 치더라도, 하나의 소설문학으로서의 성공 여부에는 상당한 의문의 여지가 있다. 특히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톤(tone), 즉 소설 속에 등장하는 러시아인에 대한 영웅적 대접과 호의에 찬 묘사는 작가의 관념의 과잉 노출을 보여준다.

 

 

 일제의 압정으로 대다수의 민중들이 삶의 뿌리를 잃은 채 방황하고 신음하던 시대에, 때마침 지식인들 사이에 일기 시작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론은 비단 마르크스주의 노선에 심취된 자뿐 아니라, 조국의 광복을 지상의 목표로 여기고 있던 당대 여건으로 볼 때 상당히 절실한 현안문제로 부각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보다도 이데올로기의 격앙된 주창을 높이 샀던 카프(KAPF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입장에서는 작품의 예술적 수준보다는 그들의 행동강령이나 이념과 동궤라고 생각한 이효석과 유진오를 동반작가라 칭하고 그들 편으로 묶으려는 저의를 가졌음을 확인하게 된다.

『노령근해』는 주제론적 측면에서 볼 때 당대 지배적이었던 문예사조와의 관련 속에서 그 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고, 또 한편 작가론적 입장에서도 이효석의 사상 및 작풍과 그 방황의 궤적을 추적하는 데 중요한 이정표로서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에는 장면이나 어떤 정황의 묘사는 있어도 그 모든 것을 유기적으로 얽어가며 진행시키는 서사적 구조가 약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