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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김정한 단편소설 『사하촌(寺下村)』

by 언덕에서 2009. 11. 12.

 

김정한 단편소설 『사하촌(寺下村)

 

 

김정한(金廷漢.1908∼1996)의 단편소설로 193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보광사라는 절의 논을 소작하며 살아가는 보광리와 성동리 사람들의 문제를 그린 단편소설로 요산의 대표작 중의 하나이다. 이 소설을 읽어보면 일제강점시대 당시 (토지를 많이 소유한) 일부 불교 사찰들이 소작을 하는 민중들을 얼마나 괴롭혔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불교가 갖고 있는 장점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의 경우처럼 치열한 '종교 전쟁'의 역사가 없다는 점이다. 절의 주지 자리를 놓고 각목을 들고 육탄전을 벌이는 일은 꽤 자주 일어나지만, 서구의 기독교같이 잔학한 학살을 서슴지 않는 종교 전쟁을 벌인 적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신도들이 시주한 돈을 갖고 일부 승려들이 포커 노름판을 벌인다든가, 비구승이 몰래 숨겨놓은 여자를 두고 섹스에 탐닉한다든가 하는 비리가 불교에 많다. 이것은 일부 기독교 목사들이 자행하는 부정부패와 거의 맞먹는다. 불쌍한 것은 어리석은 신도들이다.  

 이 작품은 수탈당하는 농촌의 피폐한 현실과 농민들의 저항의식을 사실주의적 수법으로 그린 소설이다. 억압받는 농민들의 끈질긴 삶을 통해 이 땅의 민중에 대한 작가의 애정을 보여 주고 있으며, 결말 부분에서 모순에 대결하는 민중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특별히 주인공이 없고 모순된 현실 속에서 고통을 겪는 동안 어려운 사람끼리 연대를 형성해 가는 농민 집단 전체가 주인공이다.

  

소설가 요산 김정한(金廷漢.1908∼1996)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바싹 마른 마당에서 치삼 노인은 손자를 돌보느라고 허덕인다. 그때 아들 들깨가 들어왔다. 치삼 노인은 들깨에게 논은 어떻게 되냐고 묻자, 들깨는 이젠 다 틀렸다고 하였다. 계속 되는 가뭄으로 인해 성동리 마을에 재앙을 가져왔다.

 이글이글 달아 있는 폭양 아래 난데없는 홍수소리다. 수도 저수지의 물을 터놓은 것이다. 그러나 그 물은 저수지 바로 아래에 있어 물길이 좋은 자리에 있는 보광리 사람들이 모두 제 논에 끌어다 버린다. 물이 있기는 있었지만 물길과 멀리 떨어진 논들은 물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여러 개의 논이 잘려져 나갔다. 그 이유로 고서방은 순사에게 붙들려갔다. 마을에서는 지난해에도 속은 기우제를 다시 지냈다. 기우제를 다 지내고 나자, 한 사람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구름이 온다고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비는 아직 내리지 않았지만, 비가 온 것처럼 좋아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비가 오기는커녕 이슬도 내리지 않았다.

 그러던 중 보광사 절에서도 기우 불공을 드린다는 말이 있었다. 한 집에서 한 사람씩은 모두 참석하라는 것이었다. 거의 대부분 아낙들과 아이들이었다. 절로 들어서니 불공을 드리고자 하는 여인네들이 들끓었다. 마을 아낙들은 자신들이 입은 삼베 치마는 어울리지 않는 다고 생각하고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성대하게 치러진 기우 불공은 영험이 없었고 가뭄은 계속 되었다.

 나무를 하러 나선 성동리의 아이들이 산지기에게 쫓겨 가다가 차돌이가 실족하여 죽었다. 손자 하나만 믿고 살아온 가동 할머니는 충격으로 미쳐 버렸다.

 보광사에는 갑자기 간평이 나왔다. 농민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무섭고 분했다. 그러나 절논 소작인들은 하나도 출타를 않고 기다렸다. 그러나 간평을 나온 그들은 간평할 생각은 안하고 술만 마시고 있었다. 술 취한 그들에게서 간평이 될 리 없었다.

 이튿날 동네 사람들은 엄청난 소작료 결정에 다들 놀랐다. 뿐만 아니라 영농 자금과 비료대금이 빚으로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조합에 찾아가서 영농 자금과 비료 대금 지급 기한을 늦춰 달라고 했으나 허탕이었다. 며칠 후 고서방의 논을 비롯하여 여기저기에 입도 차압의 팻말이 붙기 시작했다. 고서방은 기어이 야간도주를 하고 말았다.

 동네 사람들은 애 터지는 말로써 그들의 뒤를 염려했다. 무슨 불길한 징조인지 새벽마다 당산 등에서 여우가 울어대고 농민들은 저녁마다 야학당이 터지게 모여들었다.

 하루아침, 깨어진 종소리와 함께 성동리 농민들은 빈 짚단을 들고 차압 취소와 소작료 면제를 탄원해 보려고 보광사를 향하여 묵묵히 마을을 떠났다. 철없는 아이들도 행렬의 꽁무니에 붙어서 절 태우러 간다고 부산히 떠들어댔다.

 

 

<1901년의 범어사 일주문. 절의 모델이 범어사가 아니냐는 전언이 있다. 소설 속에 나오는 절은 농민들 위에 군림하면서 농민들을 착취하는 악랄한 절로 묘사되는데 실제로 요산 김정한이 이 소설을 발표했을 때 범어사 승려들이 '저 놈 잡아죽여야겠다'며 집으로 몰려온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일제하 대표적인 농민소설이다.

 작품에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과 거기에 놀아난 우리 불교의 한 단면이 나타나 있다. '보광사'의 논을 소작하는 성동리 주민들의 수난사를 통해 일제하에서의 모순된 농촌살이를 폭로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삶의 의의를 알려준다. 특히 이 작품이 일제가 우리나라의 토착 종교인 불교와 영합하여 식민지 정책을 원활히 하려 했던 음모와 그에 편승한 일부 종교의 반민족적 행위까지 암시하고 있음은, 작가가 이 작품을 발표한 후 승려들에게 폭행을 당했고, 1940년 일제의 언어탄압이 가중되었을 때 절필을 해 버렸던 전기적 사실에 힘입어서도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농민들은 앉아서 당하기만 하지는 않는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농민들의 소작쟁의 행렬을 그리고 있다. 흔히 보는 계몽주의 농촌소설과 달리, 농민 스스로의 현실적 자각에 초점을 맞춘 농민문학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런 작품의 모습은 당시 카프1(kAPF)가 해체되고 지주 - 소작인의 대립을 그린 작품이 사라지던 때에 나온 소설이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이 작품의 첫머리에는 일제 강점기 농촌의 현실이 상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만신에 흙고물 칠을 해 가지고 바동바동 굴고’ 있으며, ‘새까만 개미 떼가 물어 뗄 때마다 한층 더 모질게 발버둥치는’ 지렁이는 바로 가난과 가뭄, 소작료, 지주의 횡포에 시달리는 빈농의 모습이다.

 

 

 일제 강점기말의 대부분의 사찰들은 민족의 현실과는 상관없이 친일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신도들이 준 땅이 많은 절일수록 대지주로 탈바꿈했다. 이렇게 승려들과 일제의 권력 밑에서 절 아래 동네에 사는 사람들, 즉 사하촌(寺下村) 사람들은 갖은 학대와 착취에 시달린다. 가뭄으로 흉년이 든 해에도 절에서는 소작료를 강요한다. 이에 불응하는 사람들은 땅이 떨어지고 잘못하면 억울한 죄명을 쓰고 경찰에 끌려간다. 배고픔에 못 이겨 고 서방이 야반도주를 한 얼마 후 들깨를 비롯한 젊은이들은 이삭이 맺지도 않은 빈 짚단을 들고 절로 향한다. 마지막으로 탄원을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농민들의 저항은 결코 극단적이지는 않다. 김정한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삶을 사실적인 문체로 그려 낼 뿐 결코 살인이나 방화와 같이 파괴적이지 않다.

 즉, 지주 계층과 그들의 횡포에 당하기만 하다가 드디어는 저항을 택하는 소작인들의 대립을 보여주되, 작가는 「사하촌」을 진정한 농민소설로 승화시키고 있다. 요산 김정한이 위대한 작가인 이유다. 즉, 파괴적인 혹은 극단적인 행동이 아니라 비록 가난에 찌든 농촌의 현실이지만, 가뭄이라는 자연 재해와 지주와 친일 관리의 횡포를 겪으면서도 농민 스스로 연대 의식의 필요성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차분하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1.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orea Artist Proletarian federation)](1925.8.23∼1935.5. 21)의 약칭으로 일명 예맹파. 종래의 개인적이고 무목적적인 신경향파 문학을 계급의식에 입각하여 조직적인 프로 문학과 정치 운동으로 바꾸기 위해 신경향파의 시인, 작가, 비평가들이 모여 만든 사회주의 문학 단체이다. 박영희, 김기진, 이상화 등이 그 중심인물로 ‘일체의 전제 세력과 항쟁한다. 예술을 무기로 하여 계급적 해방을 목적으로 한다.’는 강령을 채택하고 「민족문학」과 대립하였다. 정치성을 지닌 단체로 10년에 걸친 정론성의 문학 이론과 도식적 작품의 양산에 힘쓴 그들은 내외 정세의 악화로 1935년 해산계를 내고 정식 해산했다. 그들은 문학 운동의 목적을 정치적, 사회적인 데 두는 과오를 범함으로써 좋은 작품은 낳지 못하고 말았다. 기관지로 [문예운동](1926), [예술운동](1927)을 발간하였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