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지매는 할매되고
허홍구
염매시장 단골술집에서
입담 좋은 선배와 술을 마실 때였다
막걸리 한 주전자 더 시키면 안주 떨어지고
안주 하나 더 시키면 술 떨어지고
이것저것 다 시키다보면 돈 떨어질 테고
얼굴이 곰보인 주모에게 선배가 수작을 부린다
"아지매, 아지매 서비스 안주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주모가 뭐 그냥 주모가 되었겠는가
묵 한 사발하고 김치 깍두기를 놓으면서 하는 말
"안주 안주고 잡아먹히는 게 더 낫지만
나 같은 사람을 잡아 먹을라카는 그게 고마워서
오늘 술값은 안 받아도 좋다." 하고 얼굴을 붉혔다
십수 년이 지난 후 다시 그 집을 찾았다
아줌마 집은 할매집으로 바뀌었고
우린 그때의 농담을 다시 늘어놓았다
아지매는 할매되어 안타깝다는 듯이
"지랄한다 묵을라면 진작 묵지."
- 시집 <사람에 취하여 > (시선사 2008)
하하, 재미있다.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시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시를 쓴 허홍구 시인(1946 ~ )은 본인이 의도했던 아니던 간에 시가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반드시 아름답거나 관념적이어야 한다는 선입관을 깨고 해학적이고 재미있는 운문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시의 소재는 그가 살아오면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이다. 환경미화원 '정씨 아저씨', 동창생 '권여사'에서부터 원로시인 '황금찬', 국회의원 '추미애' 등이 그의 '시적 소재'가 된 이들이다. 줄여 쓴 평전 같은 시들은 시적 대상이 된 사람의 장점을 놓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들의 삶의 목표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따뜻하고 해학적인 것들이다. "지랄한다 묵을라면 진작 묵지"라며 면박 주는, 이제는 할매가 된 염매시장 아지매까지 허홍구의 시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따뜻하다.
이 시를 읽다보니 십 년 전의 사건이 생각난다. 필자가 모 대기업의 공장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었다. 생산라인에서는 선공정과 후공정간의 유기적인 협조가 필수적으로 중요하다. 필자는 완성부품의 조달을 담당하는 자재업무를 책임지고 있었고 후공정은 공장 내에서 그 부품을 접수하여 라인에 투입하는 부서였다. 그 부서의 책임자와는 필자와는 동갑으로 금방 친해질 수 있었는데 근무가 끝나면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연락하여 소주를 마시는 것이 서로의 기쁨이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학창(대학)시절의 추억담이 나오고 유머러스한 입담에 포복절도하면서 항상 즐거웠다. 고향이 마산인 그는 인천에 있는 모 공대에 유학했는데 학교에서 하숙집을 오가는 길모퉁이에 있는 허름한 다방에서 일하는 아가씨를 좋아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했다. 내가 그에게 얼마나 좋아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웃으며 말했다. 부모님이 고향 마산에서 매월 빠듯한 하숙비와 용돈을 보내주시는데 그가 매일 다방에 가서 그 아가씨를 만나려면 두 잔의 커피 값이 있어야 했다. 돈은 없고…….그러다 보니 돈이 드는 하숙집 생활을 저렴한 자취방 생활로 바꾸어야 했고 급기야는 매일 세끼 밥 먹던 것을 두끼 라면으로 때워야만 했다. 이야기 도중 그는 필자에게 눈을 동그라니 뜨고 크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 아가씨를 만나기 위해 몇 달 동안 매일 라면을 끓여 먹어야 했다니깐!" 그 우직한 청춘의 순정이 우스워서 눈물이 날 뻔했다. 하하, 라면만 끓여 먹었겠는가? 계란 노른자가 든 커피도 매일 한 잔씩 마셨겠지. 세월이 흘러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인천에 출장갈 일이 있어 그 다방을 다시 찾았었는데 다방 주인은 그대로인데 그 아가씨는 딴 데로 가고 없었다고 했다. 당연하지, 찾아간 사람이 미련한 것이다.
위의 시를 읽으니 ' "오늘 술값은 안 받아도 좋다." 하고 얼굴을 붉혔다'는 부분이 참 마음에 든다. 그리고 세상풍파를 어렵게 겪으며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다방 아가씨와의 대면을 위하여 밥 대신 라면을 끓여먹고 때로는 끼니를 굶어가며 청춘을 낭비했던 순정이 슬프다.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그렇게 순수한 인정의 거리가 사라진 듯 하여 위의 시를 떠올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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