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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 이해인

by 언덕에서 2009. 10. 24.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이해인 

 

손 시린 나목(裸木)의 가지 끝에

홀로 앉은 바람 같은

목숨의 빛깔

 

그대의 빈 하늘 위에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차 오르는 빛

 

구름에 숨어서도

웃음 잃지 않는

누이처럼 부드러운 달빛이 된다.

 

잎새 하나 남지 않은

나의 뜨락엔 바람이 차고

마음엔 불이 붙는 겨울날

 

빛이 있어

혼자서도

풍요로와라

 

맑고 높이 사는 법을

빛으로 출렁이는

겨울 반달이여.

 

 

 -시집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분도출판사 1983)

 

 

 

 

 

 

 

 

 

 

 

 

이해인(李海仁 1945 ~ )은 수녀 시인이다. 이 아름다운 글을 쓰는 수도자의 시는 독자가 몰래 엿듣는 듯한 내밀한 고백과 같은, 서정적이면서도 상징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서정적이면서 명상적이다. 종교와 예술과 삶을 조화시켜 나가고자 하는 시인의 경건하면서도 정갈한 자세를 엿볼 수 있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이로서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쓰는 시인의 생애가 궁금했다. 언론에 알려진 중요한 연보들만 살펴보자.

 

1945년 강원도 양구에서 이대영, 김순옥의 1남 3녀 중 셋째로 출생

1950년 서울 청파동에 살 무렵 한국 전쟁발발. 9월에 부친이 납북 됨

1952년 부산 피난시절 부산 성남초등학교에 입학

1958년 서울 창경초등학교 졸업

1958년 서울 풍문여중 입학

1961년 부산 동래여중 졸업

1963년 제2회 신라문화제 전국 고교 백일장 시 장원

1964년 김천 성의여고 졸업. 부산 성베네딕도 수녀원 입회

1968년 수녀로 첫 서원

1970년 [소년]지에 동시 <하늘>, <아침> 등으로 추천 완료

1975년 필리핀 성 루이스 대학 영문학과 졸업

1976년 종신서원과 더불어 첫시집 <민들레의 영토> 출간

1976년 부산 성분도 병원 근무(∼1978)

1978년 부산셍베네딕도수녀원 수련소 강사(∼1982)

1985년 서울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졸업. 제2회 여성동아 대상 수상.

1997년 가톨릭대학교 겸임교수, 부산 신라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개방강좌 출강.

1998년 제6회 부산여성 문학상 수상

1998년 부산 신라대학 사범대학에서 시감상 교양 강좌(∼1999)

2000년 부산 가톨릭대학 지산 교정에서 '생활 속의 시와 영성' 강의

 

그 후 지금은 2009년...... 병원에서 암투병 중이다.

 

 수녀 시인 이해인의 작품 문체는 독자가 몰래 엿듣는 듯한 내밀한 독백체, 고백체이다. 이 작품도 그러한 특징을 지닌다.

 이 시에서 가장 핵심적인 시어는 '반달'이다. 이 반달은 '오늘'이라는 현실 상황 속에서는 불완전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시인은 보름달처럼 완전하고도 충만된 '내일'의 삶을 꿈꾸게 된다. '반달'이라는 현재의 결핍 상황은 일상적인 굶주림과 불완전성을 뜻한다. 따라서 오늘은 내가 비록 보름달이 아닌 반달로 남아 있지만, 언젠가는 보름달과 같이 맑고 높이 사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우리가 왜 시를 찾고 시를 읽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해인 수녀는 지상의 모든 대상들과 기도 안에서 만나고, 편지로서 만나고, 그리움으로서 만난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기도로서, 편지로서, 그리움으로서 다가온다. “뒤틀린 언어로 뒤틀린 세계를 노래”한 시들이 줄 수 없는 “위안, 기쁨, 휴식, 평화”를 주기에 종파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또한 그는 악기의 소리로 시를 쓴다. 우리를 불안해하지 않고,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감동으로 이끄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리듬에는 사기(邪氣)나 불화가 없다. 오묘한 화성의 조화, 부드럽고 아름다운 멜로디로 가득하다. 평생을 죄지은 자, 상처받은 자들을 감싸 안아 성모 마리아의 마음으로 사랑해온 수도자의 맑디맑은 영성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경건하고 순결한 언어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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