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노래
정현종
물로 되어 있는 바다
물로 되어 있는 구름
물로 되어 있는 사랑
건너가는 젖은 목소리
건너오는 젖은 목소리
우리는 늘 안 보이는 것에 미쳐
병(病)을 따라가고 있었고
밤의 살을 만지며
물에 젖어 물에 젖어
물을 따라가고 있었고
눈에 불을 달고 떠돌게 하는
물의 향기(香氣)
불을 달고 흐르는
원수인 물의 향기여
- 시집 <고통의 축제> (민음사 1974)
정현종 시인(1939 ~ )은 박남수의 사물 이미지 추구와 김춘수의 존재 의미 천착 경향을 결합해 놓은 듯한 독특한 시풍을 가진 이다. 그는 인간성과 사물성, 주체성과 도구성 사이의 정당한 의미망을 나름대로 추구함으로써 그 동안 인간들의 아집과 욕망에 의해 더렵혀지고 훼손된 사물 본성의 회복 가능성을 타진해 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시에서도 그러한 순결한 의도가 엿보인다. 그는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온갖 사물들이 자기의 기능과 직분을 다하면서 다채롭고 조화로운 화해의 세계를 만들기를 소망한다.
나는 요즈음 잘 마시지 않는 편이지만 젊은 날에는 꽤나 자주 술을 마셨다. 누군가가 왜 술을 마시느냐고 물으면,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서 마신다고 대답했으며, 그 부끄러움이 무어냐고 물으면 술 마시는 부끄러움이라고 객기(客氣)를 부렸었다. 위의 시구가 가슴에 와 닿는다. '우리는 늘 안 보이는 것에 미쳐 병(病)을 따라가고 있었고 밤의 살을 만지며 물에 젖어 물에 젖어 물을 따라가고 있었고 ...' 그래서 원수인 물의 향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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