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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폐사지(廢寺地) / 도종환

by 언덕에서 2009. 10. 23.

 

 

 

 

폐사지(廢寺地)                    

 

                                                   도종환

 

열정이 식으면서 노을도

하늘 한쪽을 폐허로 만들고 있었다

마음이 잿더미인 사람들은

떠도는 동안 자주 폐허와 만나곤 했다

사원(寺院)들은 수백 년을 걸어서

마침내 폐허의 완성에 이르렀지만

우리가 쌓은 성채(城砦)가 무너지는 데는

채 몇 해가 걸리지 않았다

기울어진 내 성벽(城壁)의 전돌이 허리를

땅에 대는 순간 폐허의 벌레들이 달려들어

내 생애를 분해해서는 땅속 깊이 내려갔다

산스크리트어로 된 비문(碑文) 하나 남기지 못한

왕국은 바로 잊혀지고

노을은 어둠으로 바뀌어 흔적 없이 지워졌다

영생(永生)의 선약 같은 말씀 한 모금 만들지 못하고

약초 뿌리 몇 개를 캐다만 나의 행로는

적막과 함께 마른 풀냄새를

바람에 흘려보내게 될 것이다

신화(神話)를 허공에 벽화처럼 새기고 싶어 하던 날들을

새들은 저희의 목소리로 비웃을 것이다

인간이 이룩한 모든 것은 반드시

폐허의 긴 복도를 지나가야 한다는 것을

길게 누운 채 마모되어 가는

돌부처들이 먼저 알았을 것이다

제국(帝國)의 영광을 위해 이룩한 모든 것들도

폐허의 제단에 바쳐야 하는 날이 온다는 것을

나무의 씨앗과 뿌리에게 자신의 영역 전부를 맡기고

나머지도 새들의 잠자리로 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폐허의 따뜻하고 편안한 품 안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 시집 <슬픔의 뿌리> (2002.실천문학)

 

 

 

 

 

 

 

 

 

 

 

 

 

 

 

 

 

 

 

 

주민자치센터(동사무소)에 주민등록 등본을 떼러 갔는데 입구에 시비가 있었다. 도종환 시인(1954 ~ )의 시였는데 아마 관공서에서 관청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 시도한 것 같다. 각 동네마다 유명 시인의 시비가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 동네 동사무소에서는 시집 <접시꽃 당신>에 게재된 시가 시비로 세워져 있다. 밀리언셀러 시집 <접시꽃 당신>(1986)은 '한 사내가 앞서간 제 아낙에게 한 혼잣말'의 형식을 빌려 그 그리움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노래한 시집이다. 도종환 시인(1954 ~ )은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시 <어떤 마을>이, 고등학교 문학, 국어교과서에 <흔들리며 피는 꽃> 등 여러 편의 시와 산문이 실려 있으며, EBS TV ‘도종환의 책과 함께 하는 세상’의 진행을 맡기도 하였다. 시노래 모임 <나팔꽃>의 동인으로 시를 노래로 만들어 부르는 일에 참여해 왔다.

 

 이 년 전의 일이다. 고등학교 반창회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거의 30년 만에 문예부에서 시를 쓰던 친구를 만났다. 고교시절, 동양화 같이 명징한 시를 쓰던 친구는 적성을 잘 살려서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술이 몇 잔씩 돌아가고 우리는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가서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사람 사는 모습의 대부분이 그러하겠지만 40대 이후에 만나면 '돈 이야기', '자식 이야기', '정치 이야기' 빼면 할 이야기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친구와 나는 특이하게도 도종환 시인을 화제로 하여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것은 <접시꽃 당신>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온 국민의 심금을 울린 후(영화로도 나왔다) 얼마 되지 않아 재혼을 해버린 한 남자의 지조와 사랑의 진정성에 대한 내용이 주된 것이었다. 그날의 주된 화제는 너무나 가벼운 남자의 사랑에 대한 씁쓸함이라고 정리하면 간단하겠다.

 

 <접시꽃 당신>을 넘어서는 일은 그로서도 힘겨운 과정이었을 것이다. 국문학을 전공한 그였지만 주류의 문학계에서는 그를 시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이념적으로 무장된 시단의 입장에서는 그가 감상주의적 시나 쓴다는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기실 1985년 <고두미 마을에서>를 시작으로 끊임없이 민족과 계급의 문제에 천착하는 참여시의 경향을 보여 왔다. 세상과 역사에 대한 책임감과 특유 감수성은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1988),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1989), <당신은 누구십니까>(1993) 등의 시집을 거치면서 더욱 정련되고 깊어졌다. 교사였던 그는 1989년 6월 해직됐다가 1999년 복직되는 등의 우여 골절을 겪었다.

 

'마음이 잿더미인 사람들은 떠도는 동안 자주 폐허와 만나곤 했다. 사원들은 수백 년을 걸어서 마침내 폐허의 완성에 이르렀지만 우리가 쌓은 성채가 무너지는 데는 채 몇 해가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주말이면 멀리 가지 않은 도시 근교의 산길을 거닌다. 조락의 풍경을 호흡하면서 조락하는 것은 낙엽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게 흘러가는 세월에 자신이 조락하는 것이다. 이천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찰들이 들어서고 사라졌겠는가. 폐사지에서 만나는 것은 조락한 세월이다.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시간의 영혼인 것이다. 연륜은 쓸쓸함도 위안이 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마음이 잿더미일 때는 더욱 그럴 것이다. 폐사지(廢寺址)를 육안(肉眼)으로 본다면 그다지 흥미로운 일은 아니다. 절은 사라지고 터와 명맥만 유지하는 곳. 고즈넉한 사찰 분위기도 귀를 맑게 하는 풍경소리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다 발견하게 되는 석당간 지주에 뿌리내린 거무죽죽한 이끼와 석축을 반쯤 감싼 누런빛의 잡초는 세월의 증거며 흔적이다. 이 자리에 발자국을 남긴 수많은 중생과 물체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폐사지는 '시간 앞에서 풍화하지 않는 것은 없다'란 진리를 알리는 공간이다. 세월은 유구하고 인간의 삶은 극히 짧다. 사원이 폐허가 되는 데는 수백 년이 걸리지만 우리가 집착하며 매달리는 욕심과 이기심의 결과인 번뇌의 성채가 무너지는 것은 몇 해가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주옥과 같은 시를 읽고 또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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