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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봄날은 간다 / 기형도

by 언덕에서 2009. 10. 22.

 

 

 

 

 

봄날은 간다
                                                  기형도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열풍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2시착 시외버스도 떠난 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 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의 자손들일까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사내들은 화투패마냥 모여들어 또 그렇게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간다

여자가 속옷을 헹구는 시냇가엔

하룻밤새 없어져버린 풀꽃들

다시 흘러들어온 것들의 인사(人事)

흐린 알전구 아래 엉망으로 취한 군인은

몇 해 전 누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

몇 번인가 아이를 지울 때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 흘릴 뿐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서

추억은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소읍은 무서울이만치 고요하다, 누구일까

세숫대야 속에 삶은 달걀처럼 잠긴 얼굴은

봄날이 가면 그뿐

숙취는 몇 장 지전 속에서 구겨지는데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저 흙먼지들은

굳은 땅 속으로 하나둘 섞여들는지

 

 

-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 지성사 1989)

 

 

 

 

 

 


 

 

1980년대 마지막을 장식하며 요절한 위대한 시인 기형도 (1960 ~ 1989)의 작품은 주로 유년기에 경험했던 일들에 대한 우울한 기억이나 회상, 그리고 현대의 도시인들의 살아가는 생활을 독창적이면서도 강한 개성이 묻어 나오는 시어와 문체로 그려내고 있다. 그는 살아 있을 당시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일부 비평가에 의해서만 내면적이고 비의적이며 우화적인, 독특한 색채의 시인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이 출간되었을 때 그에 대한 평가는 폭발적으로 늘어났으며, 이후 한국 시의 새로운 경향으로 자리 잡았다. 그의 시에는 죽음과 절망, 불안과 허무 그리고 불행의 이미지가 환상적이고 일면 초현실적이며 공격적인 시인 특유의 개성적 문체와 결합한 독특한 느낌의 시를 이루어 내고 있다. 그는 동일 이미지의 반복, 돌연한 이미지와 갑작스런 이질적 문장의 삽입, 도치, 감정의 고조(그는 감탄사를 연발한 드문 경우의 시인이었다)등 특징적인 시어 구성과 문체를 일관되고 지속적으로 사용했다. 그러한 그의 필체 대부분은 암울한 세계관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형상화시키는데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유년시절 불우한 가족사와 경제적 궁핍, 그리고 죽음에 대한 체험과 이에 대한 강렬한 심미적 각인이 시 전체에 가득한 삶에 대한 부정적 영상을 이끈 원인이자 그의 시적 모티브를 유발하고 있는 동인일 것이다. 그러한 것들은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창을 닫고 비관적 세계로 침전케 한 주된 이유로 이해되고 있다. 그의 시에는 현실에 대한 역사, 즉 역사적 전망이 없으며 따라서 그의 시는 퇴폐적이라 말할 수 있다는 비판이 있으나 초현실적 이미지를 추구하면서도 일상의 현실을 비판한 독특한 시세계는 주목할 만 하다 하겠다.

 

 위의 시는 늦은 봄날, 변두리 도시의 시외버스 정류장 근처 '서울집'이라는 대포 집에서의 늙은 작부의 일상을 그리고 있는 몽환적인 시이다. 그 작은 도시는 1980년대의 광명시일 것이다. 미루나무 그늘 속을 첨벙이며 오지 않을 2시착 시외버스는 기다리고 있을 그녀는 분가루 냄새를 날리며 외상값을 받아야 한다. 저녁이면 나무젓가락을 두드려야 하고 숙취가 가시지 않은 낮에는 뭇 남정네들의 손때가 묻은 속옷을 술집 근처 시냇가에서 빨았을 것이다. 성에 굶주린 군인은 그녀의 동생뻘이고 그녀는 먹고 살기 위해서 낙태를 해야 하는 서글프고 비참한 인생이다. 시인은 손노원이 작사하고 박시춘이 작곡하여 백설희가 부른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많은 풍상을 겪은 뒤쯤에 바라본 듯한 흑백의 무성영화처럼 담담하고 표정 없이 읽혀지는 이 시 속의 그녀에게 숙취 속에 지전이 구겨질 뿐인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고통의 시간이 사라지겠는가를 탄식하고 있다.

 

 이처럼 기형도의 시들은 유년시절의 가난, 사랑의 상실, 부조리한 현실의 폭력, 자본주의 사회의 물화(物化)된 인간의 모습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대체로 절망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그의 절망은 절망의 끝까지 가본 자의 처절한 절망으로, 우리 시에서 보기 드문 풍경에 속한다. 이 시는 폭력적인 현실과 그로 인한 죽음, 공포의 삶을 고도의 상징적 표현 속에 담아내고 있다. 이 시는 지나치면서 보아온 어떤 장면을 머리에 새겨 두었다가 시로 풀어 썼을 것이다. 그의 시세계에는 세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서부터 돌출되어진 고통과 파괴의 흉터들이 즐비하고, 젊어서 세상을 등진 불우한 운명이 자아내는 죽음과 쇠락의 이미지들이 들끓고 있기 때문이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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