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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가을에 / 정한모

by 언덕에서 2009. 10. 19.

 

 

 

 

 

 

 

 

 

가을에

 

                                                        정한모 

 

 

맑은 햇빛으로 반짝 반짝 물들으며

가볍게 가을을 나르고 있는

나뭇잎

그렇게 주고받는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주십시오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쥔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 오늘이

마침내 전설 속에 묻혀버리는

해저(海底)같은 그날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영원히 아름다운 진리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어렸을 적에

불같이 끓던 병석에서

한 없이 밑으로만 떨어져가던

그토록 아득하던 추락(墜落)과

그 속력으로

몇번이고 까무러쳤던

그런 공포의 기억이 진리라는

이 무서운 진리로부터

우리들의 이 소중한 꿈을

꼭 안아 지키게 해주십시오.



 -<여백을 위한 서정> (신구문화사.1959)-









 

 




내가 고등학교 시절 머리를 싸매고 읽었던 정한모 시인(1923 ∼1991)의 시 '가을에'는 불혹이 지난 다음에야 불세출의 가작임을 알게 되었다. 이 시는 자세히 읽어보면 감각적 이미지를 중심으로 시상이 전개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시의 핵심 제재인 '가을'의 이미지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조락(凋落)의 이미지로서 반(反)문명적인 현대의 삶 속에서 파괴되어 가는 인간성의 상실을 그리고 있다. 또 하나는 명징하고 온화한 가을의 이미지로 파악한 점이다. 이것은 휴머니즘을 옹호하고 고양시키려는 의지로서, 시인의 사상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기본적인 주제로 볼 수 있다.


 이 시는 비인간적 물질문명으로 인해 인류가 멸망하게 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 속에서, 생명에의 신뢰와 사랑을 지키게 해 달라는 간절한 소망을 경건한 기도 형식으로 나타내고 있다.

 점차 삭막해져 가는 세상일지언정 따스한 인간애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지켜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 화자는 어린아이가 올리는 순수한 기도 같은 성스런 생활을 소망하며 옛이야기같이 순수한 인간성 회복을 기대한다.

 당신을 향한 화자의 기도는 우주의 합일에 의한 영원히 아름다운 진리를 간직하게 함으로써 한 차원 더 높아진 차원에서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다는 간절한 소망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세상은 이미 화자가 겪었던 어린 시절의 병상 체험처럼 '아득한 추락과 / 그 속력으로 몇 번이고 까무러쳤던 / 공포'가 현실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무서운 진리로 표현되고 있는데, 그것은 구체적으로 기계 문명으로 인해 비인간적인 것이 범람하는 1950년대의 현실, 즉 전쟁이나 폭력 등을 암시한다. 1차대전, 2차대전, 6.25전쟁, 월남전쟁, 이라크전쟁……. 이렇게 전쟁과 예기치 않은 죽음은 계속되어왔다. 이러한 불안감으로 인해 절대자를 향해 올리는 화자의 간절한 기도는 아름다움과 진실된 인간 세상을 향한 열망을 더욱 강렬하게 느끼게 해 주는 것이다. 이는 휴머니즘에 바탕을 두고 순수의 본질을 진지하게 탐구하는 시인의 정신 자세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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