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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소릉조(小陵調) / 천상병

by 언덕에서 2009. 10. 17.

 

 

 

 

 

 

 

 

 

소릉조(小陵調) 

                   

       - 1970년 추일(秋日)에 -

 

                              천상병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있고,

 

외톨배기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 시집 <새> (조광출판사 1971) 

 

 

 

 

 

 

 

 

 

 

 

 

천상병 시인(1930 ~ 1993)은 1949년 마산중학 5학년 때, [죽순(竹筍)] 11집에 시 <공상(空想)> 외 1편을 추천받았고, 1952년 서울대 상과대학 재학 중 [문예(文藝)]에 <강물>, <갈매기> 등을 추천받아 데뷔 후 여러 문예지에 시와 평론 등을 발표했다.

 1967년 7월 동베를린 거점 문인간첩단 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가난ㆍ무직ㆍ방탕ㆍ주벽 등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그는 우주의 근원, 죽음과 피안, 인생의 비통한 현실 등을 간결하게 압축한 시를 썼다. ‘문단의 마지막 순수시인’ 또는 ‘문단의 마지막 기인(奇人)’으로 불리던 그는 지병인 간경변증으로 고생하다가 아침 식사 도중 갑작스럽게 변을 당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어렵고 불행한 생활로 이어지는 생애를 보내면서 삶의 어두움, 외로움, 죽음 등의 문제를 다루는 시를 많이 지었다. 이러한 시를 쓰면서도 맑은 눈과 청순한 시정신을 구현하려고 애썼다. 그의 시를 읽어보면 맑고 투명하게 사물을 인식하는 눈을 가지고 있다. 순진무구한 시정을 드러내고 있는데 현실 삶의 즐거움이나 괴로움을 말할 때에도 천진한 상상력을 잃지 않는다. 특히 세속 삶에 대한 거추장스러움을 벗어버리는 소박한 정서는 죽음과 가난함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허무주의와 구차함에 떨어지지 않는 자연스러움과 당당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소릉(少陵)은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호이다. 위의 시에서는 두보와 자신을 비유하고 있다. 두보와 천상병의 시 대부분은 가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전 생애(全生涯)에 걸쳐 일정한 직업 없이 떠돌 수밖에 없던 상황에서 시대와 불화를 겪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가난과의 끈질긴 갈등과 화해 속에서 가난 길들이기에 이력이 알 것도 자명한 이치이다. 가난이란 어쩌면 그에게 자연스러운 일이고, 또한 운명적인 것이었을 수도 있다.

 이 시는 조금은 진부하고 산문적이면서도 그 단순, 소박함으로 하여 어떤 시적 운율을 느끼게 한다. 시인은 자신의 신상 진술에 이어 어떤 개인적이거나 일반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삶의 신비에 대한 경이감을 표출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시가 지닌 기능 중의 하나가 우리의 의식을 굳어 있는 틀에서 해방시켜 인간의 삶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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