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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정릉(貞陵) 살면서 / 박재삼

by 언덕에서 2009. 10. 16.

 

 

 

정릉(貞陵) 살면서 

                                                     박재삼

 

솔잎 사이사이

아주 빗질이 잘된 바람이

내 뇌혈관에

새로 닿아 와서는

그 동안 허술했던

목숨의 운영을 잘해 보라 일러주고 있고…

살 끝에는 온통

금싸라기 햇빛이

내 잘못 살아온 서른다섯 해를

덮어서 쓰다듬어 주고 있고…

그뿐인가

시름으로 고인 내 간장(肝臟) 안 웅덩이를

세월의 동생 실개천이

말갛게 씻어주며 흐르고 있고…

친구여

사람들이 돌아보지도 않는

이 눈물나게 넘치는 자산(資産)을

혼자 아껴서 곱게 가지리로다.

 

 

 - 시집 <햇빛 속에서>(문원사 1970)

 

 

 

 

 

 

 

 

 

 

 

 

 

박재삼 시인(1933 ~ 1997)은 일본 동경에서 태어났다. 경남 삼천포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중학교 진학을 못하고 삼천포여자중학교 사환으로 들어가 일하였는데, 이곳에서 교사이던 시조시인 김상옥을 만나 시를 쓰기로 결심하였다. 그 뒤 삼천포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해 수료하였다. 1953년 [문예]지에 시조 <강물에서>가 추천되고, 1955년 유치환, 서정주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시 <정적>, <섭리>로 데뷔했다.

 위의 시는 박재삼의 제2시집 <햇빛 속에서> (1970)에 수록된 작품이다. 그의 전생애를 괴롭힌 것은 가난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병이었다. 위궤양, 고혈압, 뇌졸증, 신부전증 등 갖은 병마에 시달렸다. 가난과 술은 병마의 원인이 되었지만, 그는 병과 같이 가기로 작정했더니 한결 나아진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주눅들지 않고 웃으면서 살았다. 그의 묘는 충남 공주에 있으며, 박재삼 시비(경남 사천시 서금동 노산공원)에는 <천년의 바람>이란 시가 새겨져 있다. 이 시는 1969년 「대한일보」에 재직하다가 고혈압으로 쓰러졌을 때, 그 병중에 겪은 고뇌와 병후(病後)에 다시 햇빛을 우러러볼 수 있게 된 기쁨이 주조(主調)를 이루고 있다. 난해한 것이 특징이 된 현대시의 병폐(病弊)가 이 시 <정릉 살면서>에서는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다. 한 시인의 꾸밈없는 생활감정이 나타나는 서정으로 노래하고 있으면서도, 조금도 독자에게 허술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의 시는 소월, 영랑, 목월의 시보다도 관념적인 요소가 적고 서정성이 두드러진다. 그 서정은 우리의 전통적 한에 관계되는 데, 이는 박재삼이 어린 시절을 보낸 삼천포 시절의 가난했던 생활환경, 즉 시인이 직접 체험한 가난에 기인한다.

 박재삼은 <한 경험>이란 글에서 이 시에서 보이는 서정성과 유사한 서술을 보이고 있다.

 “언덕은 바다가 바로 눈 앞에 보여 오는 곳에 있었다. 가만히 앉았기도 어줍은 일이기도 해서, 머리를 땅에 닿을 만하게 물구나무서서 두발 사이로 바다를 보았다. 그때 웬일인지 내 눈에선 눈물이 괴더니 그것이 얼굴로 젖어 내렸다. 바다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늘 보는 바다가 훌륭한 경치로서 내 눈에 도달해 온 것이다. 그때까지 바다는 이웃 사람의 얼굴을 대하듯 별것 아닌 것으로 내 마음에 자리하여 있다가 별안간에 아름다워 왔기 때문이다. 은금이라 한다면 좀 속된 표현일 것이고, 하여간 눈물의 꽃이 꽃 피어 난 꽃밭인 양 바다는 온통 현란한 경개로 내게 밀어 닥쳤는지 모른다.”

 고려대 국문과 중퇴 후 신문 등에 바둑관전평을 쓰는 일 말고는 평생을 다른 직업 갖는 일없이 살았던 이 자유인에게 대신 가혹한 가난과 병마는 혹독한 것이었다. 35세에 처음 고혈압으로 쓰러진 후 그는 임종시까지 만성 신부전증과 심근경색으로 투병해왔다. “남편이 젊으셨던 시절에는 지나칠 정도로 약주를 드셨지요. 매일 밤 12시가 돼야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 어귀에서 노래소리가 들리지요.” 그래서 박씨는 동네 부인들 사이에서 ‘12시 5분 전’이라는 별명으로 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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