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르게네프 장편소설 『아버지와 아들(Отцы и дети)』
러시아 소설가 투르게네프(Ivan Sergeevich Turgenev.1818∼1883)의 장편소설로 농노가 해방된 1861년에 완성, 이듬해 1862년 [러시아 보도(報道)]지에 발표하였다. 작자는 체르니셰프스키 등 혁명적 민주주의자를 바자로프의 성격에 투영시켜서 ‘아버지와 아들’의 사상적 상극을 묘사하였다. 발표 후 진보ㆍ보수 양진영으로부터의 찬반양론으로 떠들썩했다.
작가는 당시 대립하던 보수파와 급진파를 귀족 출신의 이상적 자유주의자인 '아버지 세대'와 잡계급 출신의 혁명적 민주주의자인 '아들 세대'로 대표해 그려낸다. 이러한 묘사, 특히 급진적인 사상의 주인공 바자로프에 대한 설정은 발표하자마자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의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또, 이 작품은 당시의 시대 상황과 부합해 화제를 일으켰던 것을 넘어 등장인물들에 대한 생생한 성격 묘사와 시대를 초월한 소재로 오랜 기간 사랑받고 있다. 작가는 세대적 갈등과 인생에 대한 철학적 사색, 뜨거운 연애감정 등 오늘날까지도 통용되는 공통의 정서를 담아내며 구시대의 사회정치적 소설로만 정의할 수는 없는 보편적 공감대의 작품을 선보인다.
투르게네프는 이 작품에서 ‘니힐리스트(Nihilist: 허무주의자)’라는 말을 처음 쓰고 있다. 니힐리스트는 신을 대신해 과학을 숭배하는 무신론자이며 유물론자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혁명 이론의 허무주의와는 달리 도덕ㆍ정치ㆍ일체의 개인적인 것에 대한 제약과 국가ㆍ사회ㆍ가정의 권위에 대한 반항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농노해방을 눈앞에 둔 러시아 사회는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봄, 대학을 졸업한 아르카디는 친구 바자로프를 데리고 아버지와 백부가 살고 있는 니콜라이 농장으로 돌아온다.
장차 의사가 될 꿈을 갖고 있는 바자로프는 기성사회의 전통이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진보적인 사상의 소유자로, 이상주의적 공론만 일삼으며 무위도식하는 구세대의 전형인 아르카디의 백부인 파벨과 늘 대립 관계에 있다. 아버지 니콜라이는 실용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바자로프의 말에 뒤쳐진 자신들의 세대에 한탄을 한다.
가정부인 페니티카와 하인들은 진보적인 사상을 지닌 바자로프에게 호감을 갖는 한편, 그가 귀족 출신이 아니라 자신들과 같은 평민임을 알고 친구처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파벨과 바자로프는 정치, 문화, 예술 등 전반에 걸쳐 끊임없는 논쟁을 펼친다.
어느 날 바자로프와 아르카디는 주지사 저택의 무도회에서 젊고 아름다운 미망인 오딘초바를 알게 된다. 오딘초바 역시 두 청년에게 관심을 느껴 자신의 영지로 초대한다. 연애를 어리석은 짓이라며 부정했던 바자로프는 2주간 그 마을에 머물면서 기품 있는 오딘초바에게 반하여 사랑의 감정을 품게 된다. 오딘초바는 바자로프에게 강한 느낌을 갖지만, 그 이상 넘어서질 않는다.
바자로프는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애를 태우는 양친의 곁으로 돌아와나 생활의 권태로 3일 만에 다시 어르카디의 집을 찾아간다. 그러나 자신의 부모를 대하는 바자로프의 태도를 못마땅해하는 아르카디는 그를 냉대하기 시작한다.
바자로프는 마리노 마을에서 의료 활동을 하면서 페네치카와 가까이 접하게 되고, 그녀에게 장난 삼아 키스를 하다가 백부 파벨에게 들켜 결투 신청을 받게 된다. 이를 물리칠 도리가 없는 바자로프는 결투 도중 파벨의 다리에 상처를 입힌다. 모든 상황을 아르카디에게 설명하고 난 바자로프는 아르카디와 오딘초바에게 이별을 고하고는 고향으로 돌아와 의료 사업에 전념한다.
그러던 어느 날 티프스로 죽은 농부를 해부하다가 자신도 감염되면서 상태가 절망적임을 깨닫는다. 바자로프는 엄습하는 죽음의 공포와 싸우면서 늙은 부모의 부탁을 받아들여 종교에 귀의한 뒤 조용히 숨을 거둔다.
결미에서는 아들의 묘지를 자주 찾아와서는 오래오래 말없이 지켜보는 애처로운 노부부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으며, 무덤 위에 피는 꽃은 ‘영원한 화해와 융화, 그리고 무한한 생명의 신비에 대해 말해 주는 것’이라는 작가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아버지와 아들』은 투르게네프의 소설 중에서 사회성을 띤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러시아 제정시대의 농노해방과 사회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이 나오자 문단을 비롯한 각계각층에서 찬반의 대립으로 들끓었으며, 신구 양 세대로부터 각기 자기 세대를 비방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진보파들은 이 작품 속에서 자기들에 대한 희화를 보고 격분하였으며, 보수파들은 혁명을 찬미했다고 비난하였으나, 자유주의자인 투르게네프는 바자로프를 혁명적 민주주의자로 아름답게 묘사하지도 않았거니와 동시에 그의 약점에 대해서 맹목적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기성의 가치 체계를 부정하는 진보적인 사상의 소유자인 바자로프를 등장시켜 구세대인 귀족의 몰락과 신세대인 새로운 시민 계급의 대두를 예고하고 있다. 니힐리즘이라는 신조어가 소개되기도 한 이 작품은 평민계급 출신의 바자로프라는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어 냄으로써 당시 러시아의 현실에 반기를 드는 지식인을 예술적으로 전형화하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
『아버지와 아들』은 19세기 러시아의 사회정치적 현실을 지진계처럼 세밀하게 기록한 사실주의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의 대표작이다.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연대기 작가’로 불리는 투르게네프가 1862년 발표한 이 소설은 러시아 문학사를 통틀어 가장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킨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귀족 출신의 이상주의적 자유주의자 ‘아버지 세대’와 잡계급 출신의 혁명적 민주주의자인 ‘아들 세대’의 갈등이 나타난 이 작품은 진보와 보수가 갈등하던 당시의 시대 상황과 맞물려 두 진영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소설가 나보코프는 『아버지와 아들』을 투르게네프의 최고 걸작이라고 평했고 평론가 미르스키는 사회적인 문제가 찌꺼기 없이 완전히 예술로 승화된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구시대의 사회정치적 소설로만 보기에는 아쉬운 부분이 많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이 작품은 언제나 비슷한 형태로 일어나는 세대 갈등, 자식을 향한 부모의 변함없는 애정, 인생에 대한 철학적 사색과 뜨거운 연애감정 등 시공간을 초월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흥미로운 소설이기도 하다.
-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Ivan Sergeyevich Turgenev, 러시아어: Ива́н Серге́евич Турге́нев, 1818년 11월 9일(율리우스력: 10월 28일) ~ 1883년 9월 3일(율리우스력: 8월 22일))는 러시아 소설가이다.그는 러시아 중부 오룔 시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1818년 10월 28일에 태어났다. 아버지가 육군 대령으로 퇴직하고 스파스코예 마을로 이주함에 따라서 투르게네프는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이 시골 마을에서 보냈다. 그 후 모스크바 대학 문학부와 페테르부르크 대학 철학부, 그리고 독일의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하였다.그는 러시아 고전 작가들 가운데 가장 서구적인 작가로 알려져 있다. 인생의 많은 세월을 서유럽에서 보냈고 서구인들과의 교류도 활발했으며, 사상적 기반도 서구주의적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는 러시아의 대자연과 시골 풍경이 섬세하고 수려한 필치로 묘사되고 있으며, 동시에 서구의 자유주의 사상과 휴머니즘이 조화롭게 반영되어 있다.그는 1852년에 25편의 중단편 모음집으로 출간된 《사냥꾼의 수기》로 주목받는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 후 당시의 시대상과 인간상을 섬세한 서정적 필치로 심층 묘사하여 그에게 ‘러시아 인텔리겐차의 연대기 작가’라는 별칭을 얻게 해준 장편소설들 《루딘》(1856년), 《귀족의 둥지》(1859년), 《아버지와 아들》(1862년), 《연기》(1869년), 《처녀지》(1877년) 등이 출판되었다. 그는 1883년 8월 22일 러시아가 아닌 프랑스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는 러시아로 옮겨져 그 해 9월 27일에 페테르부르크에 안장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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