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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가을 강물 소리는 / 이향아

by 언덕에서 2009. 10. 14.

 

 

가을 강물 소리는

 

                                                              이향아

 

이제는 나도 철이 드나 봅니다, 어머니

가을 강물 소리는 치맛귀를 붙잡고

이대로 그만 가라앉거라, 가라앉거라

타일러 쌓고

소슬한 바람 내 속에서 일어나

모처럼 핏줄도 돌아보게 합니다

함께 살다 흩어지면 사촌이 되고

다시 가다 길을 잃어 남남이 되는,

어머니,

가을 강물 소리에 귀기울이다가

지금은 내왕이 끊긴 일가친척을 생각하게 됩니다

가고 가면 바다가 벼랑처럼 있어

거기 함께 떨어져 만난다고 하지만

죽어서 가는 천당처럼 아득하기만 합니다

 

가을 강물을 보면 문득 용서받고 싶습니다, 어머니.

즐펀히 너브러진 물줄기가 심장으로 고여서

땀으로 눈물로 이슬 맺는 은혜

가을 강가에 서서

나는 모처럼, 과묵한 해그림자 갈대그늘을

따라가면서 잠겨들면서

내 목숨 좁은 길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 시집<강물 연가> (나남 1989)

 

 

 

 

 

 

 

 

 

 

깊어가는 가을에 잘 어울리는 주옥과 같은 시이다. 강물은 흔히 인생의 흐름에 비유되곤 한다. 산악에서 발원하여 바다에 이른 강의 흐름을 생각해 보면 그렇다. 강 상류의 빠르고 격한 흐름은 젊은 날의 열정을, 하류에 이르러 깊고 완만해진 흐름은 노년의 지혜를 상징하기에 적절하다. 또한 강의 쉬임 없는 흐름은 시간의 끊임없는 운행에 비유되기도 한다. 시인은 지금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의 강가에 서 있다. 이 시의 소재가 되는 가을 강물은 여름과 달리 수량이 많지 않으므로 유속이 빠르지 않다. 유유한 강물의 흐름을 보면서 시인은 자기성찰의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이향아 시인(1938 ~ )은 범상한 일상을 소재로 단아한 언어, 자연스런 가락 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특히 장황한 수식어를 쓰지 않고 삶의 애환을 표현하고, 사물을 유정한 것으로 형상화하는 데에 탁월하다. 또한 엄정한 언어의 구사로 표현의 사실성을 뒷받침하면서 몽롱한 환상과 꿈을 여백으로 두고 있다. 내면으로 침잠하여 자신을 돌이켜 보는 시인이 먼저 떠올리는 것은 자신과 핏줄을 나눈 사람들의 삶에 관한 관심이다. 멀리 있는 친척, 더욱 멀어져 남과 같아진 친척들에 대한 관심은 단순히 혈족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자신과 비슷한 핏줄을 나눈 사람들의 삶에 관한 관심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근원적 삶의 모습을 돌아보려는 의지와 결부된다. 시간이 흘러 강물이 바다에 도달하듯이 삶의 종말에는 결국 모두 만나게 될 것이지만 그 아득한 끝에 도달하기 이전 현재적 삶의 양상에 시인은 관심을 둔다.

 

 근원적 삶의 양상을 돌아볼 때 삶과 목숨에 대하여 한층 겸허한 자세를 가지게 되기 마련이다. 2연에서 용서를 구하는 겸허함은, 삶이라는 강물이 땀과 눈물로 고여서 흐른 넋이라는 것을 깨닫는 자에게 찾아온 것이다. 강이 해 그림자 드리운 갈대그늘을 가지듯 삶에는 밝음과 그늘이 있기 마련이다. 시의 화자는 삶의 굴곡 많은 강 언덕을 따라가며, 혹은 깊이 침잠하기도 하면서 삶에 대한 겸허한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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