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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귀촉도(歸蜀途) / 서정주

by 언덕에서 2009. 10. 10.

 

 

 

귀촉도(歸蜀途)

 

                             서정주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 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리.

 

신이나 삼어 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색인 육날 메투리.

은장도(銀粧刀)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은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구비구비 은핫물 목이 젖은 새,

참아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 월간 <춘추> 32호 (1943년 10월)

 

 

 

 

*어휘ㆍ시어 풀이

<파촉(巴蜀)> : 중국 쓰촨성(四川省)에 있던 촉 나라 땅을 일컫는 말. 여기서는 '서역'과 함께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머나먼 죽음의 세계를 의미한다.

<육날 메투리> : 삼 껍질로 짠 신. 메투리는 미투리의 방언.

<이냥> : 이대로. 내쳐.

<귀촉도(歸蜀途)> : 문자 그대로는 '촉(蜀) 나라로 가는 길'. 여기서는 새 이름, 새 울음소리와 겹쳐 있고, 돌아간 임의 환생한 모습을 가리키기도 함. 옛날 중국 촉나라의 망제(望帝)가 쫓겨나 촉 나라를 그리다가 죽은 넋이 이 새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음. '두견새'로서 망제혼(望帝魂), 불여귀(不如歸), 자규(子規) 등 많은 이칭(異稱)이 있다.

 

 

 

 

 

 

 

 

 

 

 

 위의 시는 우리나라의 '국가대표 시인'이라고 할 수 있는 미당 서정주( 1915 ~ 2000)의 제2시집 <귀촉도>(1946)의 표제가 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시는 제1시집 <화사집>(1938) 시기보다 앞선 1936년에 쓴 것이라 한다. 시기적으로 보아 <화사집>에 수록될 시가 제2시집에 수록되고 또 표제가 되었다.

 '두우(杜宇)가 죽어 그 혼이 화하여 새가 되니, 그 새를 두견(杜鵑) 또는 자규(子規)라 하였다'는 전설을 소재로 하여, 망국의 설움을, 애절한 여인상의 가락에 나타낸, 비애절정(悲哀絶頂)의 시다. 표제가 된 '귀촉도'는 두견ㆍ자규 등과 함께 불리는 새의 이름에서 나왔다.

 이 시는 사별한 임을 향한 정한과 슬픔을 처절하게 노래한 시이다. 애절한 한의 객관적 상관물로 '귀촉도'가 나오고, 그와 걸맞게 계절감을 나타내 주는 '진달래'가 나온다. '서역'이나 '파촉'은 서정주의 불교적 상상력과 결부된 죽음의 세계를 나타낸다. '은장도'는 이 시의 화자가 여자임을 알게 해 준다.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진달래와 두견새에 얽힌 전설을 알아야 할 것 같다. 조조의 위나라와 손권의 오나라, 유비의 촉나라 세나라가 공존했던 시절을 우리는 삼국시대라 부른다. 유비가 죽고 제갈량이 죽은 뒤 촉나라는 위나라의 침공으로 망하게 된다. 유비의 아들인 망제(望帝) 유선은 당연히 위나라에 인질로 잡혀가게 된다. 그는 애타게 촉나라를 그리워했고, 돌아가 복위(復位)를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그리움이 얼마나 애탔던지 죽어 원혼(冤魂)이 되어 두견새가 되었다. 그리하여 밤이고 낮이고 ‘귀촉도(촉나라로 돌아가고 싶다)’ 하고 슬피 울다가 피를 토했다. 이 두견새의 피가 진달래의 뿌리에 배어들어 꽃이 붉어졌고, 그래서 진달래를 두견화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중국식의 이름이다. 두견새나 진달래, 즉 두견화의 이미지는 그리움이다.

 

 중국의 역사가 오천년이 넘는다고 하지만 한족이 중국대륙 전체를 지배한 것은 한나라, 당나라, 명나라 등 몇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북방계의 이민족이 중국을 지배했다. 우리민족과 같은 계열인 동이족이 세운 나라만 해도 은나라, 진나라, 수나라,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 등 셀 수 없이 많다. 소위 오랑캐에게 지배당한 한족의 스트레스는 심했을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이민족의 지배를 받을 때마다 이민족과는 관계없이 한족의 전통을 이어려고 했던 삼국시대의 촉나라를 좋아하고 유비나 관우를 광적으로 섬긴다. 이 시는 이토록 중국인이 좋아하는 촉나라와 피를 토하며 우는 그리움의 새, 두견새와 두견화(진달래)가 소재가 되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 망제가 돌아가고자 애태웠던, 삼만리 밖의 파촉을 소재로 하여 이별의 애상(哀傷)과 승화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눈물에 가려 아른거려 보이는 임 떠난 길은 서역(촉나라)으로 가는 삼만리만큼이나 아득하다. 그 길은 그리움의 꽃이 만발하여 꽃비처럼 지는 길이기도 하다. 임을 보내고 나니, 그 그리움이 너무도 사무쳐 은장도 칼로 머리카락을 잘라 메투리나 삼아 드릴 걸 하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정감은 한국 여성의 전형적인 것이다. ‘육날 메투리’나 ‘은장도’가 또한 우리 고유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움을 표현하는 소재는 중국 고사에 얽힌 것이지만, 그것을 더욱 승화시켜 주는 것은 우리 고유의 소재들이다. 임 그리는 마음은 밤이 깊을수록 더욱 사무쳐만 온다. 초롱불도 지친 밤하늘에는 은하도 기울고, 두견새가 촉나라 그리운 마음으로 목이 젖도록 피를 토하며 운다. 임 보낸 나의 마음도 ‘귀촉도, 귀촉도’하고 우는 두견새의 울음처럼 피가 맺힌다.

 

 이 시는 중국이야기를 우리식으로 풀이하여 그려낸 이런바 '퓨전 요리' 같은 시이다. 자세하게 들어가보면 미당의 사대주의적인 역사관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중국인들이 그토록 싫어하고 경멸해하는 오랑캐인데 미당은 중국인이 좋아하는 소재를 갖고 우리식으로 쓰고 있으니까 말이다.

 <국화옆에서> 등 미당의 시 1~2편을 암송하지 못하는 한국인들이 과연 있을까? 미당의 시편들은 시 그 자체로, 혹은 패러디한 글로, 아니면 가곡으로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새삼 일깨워준 시인. 민족 고유의 정서와 차원 높은 언어의 기교를 결합한 '언어의 연금술사'. 노벨문학상에 5차례나 추천된 한국의 대표문인이다. 그러나 그 많은 찬사를 한몸에 받았던 그였지만, 친일행적 시비와 5공시절 전두환씨에 대한 지지발언으로 두고두고 후학들의 지탄을 받기도 했다.

 

 나의 고교시절 국어선생님은 시인으로서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에서 미당의 지도를 받으셨다.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시인이신 국어선생님과 그의 시세계에 대해서도 소개해 보겠다) 선생님은 송기원 시인과 대학동기이시다. 선생님은 대학시절은 물론이고 교단에서도 정치 및 현실참여 문학에 대단히 관심이 많으셨다. 수업시간에 직접 들은 이야기이다. 언젠가 미당에게 '현실참여 문학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미당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인간이 유사 이래로 현실에 만족해 본 적이 있느냐?"

 

 위의 일화는 미당의 정치관이라던지 세계관을 한 눈에 파악하게 하는 좋은 예인 것 같다. 미당은 85세 되던 해 부인 방옥숙(方玉淑)씨 별세(2000년 10월)이후 곡기를 끊고 맥주로 연명하다 2000년 12월 숙환으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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