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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 최승자

by 언덕에서 2009. 10. 15.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최승자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 시집 <이 시대의 사랑> ( 문학과 지성사 1981)

 

 

 

 

 

 

 

 

 

 

 

 

 

 

 

 

1980년대에 최승자 시인(1952 ~ )의 출현은 우리나라 현대 여성시에서 하나의 분기점이 된다. 그는 `여성시'와 '남성시'의 경계를 한순간에 날려버렸다. 전통적 여성시가 보여 왔던 곱고 아리땁고 여린 감수성이 사라진 그의 시는 과감하게 단언하고, 잔인하고 통쾌하게 나타난다. 그의 시에 이르러 여성시와 남성시의 구분이 없어졌던 것이다 . 위의 시는 그 대표적인 예로 시인의 인식저변을 확연하게 드러내 보인다.

 

 이 시에서는 화자 스스로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표현한다. 자신의 전생은 애초부터 마른 빵에 핀 곰팡이,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등의 비유적 매개들이 보여주듯 아주 하찮고 지저분한 그 어떤 것이었던 것이다. 지난 날 아무 부모도 나를 키우지 않았으며, 지금은 아무데서나 하염없이 죽어가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처음 두 연에서는, 극도의 공격적 태도로 자신을 몰아세워 통상 사람들이 감추고 있는 자신에 대한 낭만적 환상을 깡그리 부순 후, 세 번째 연에 이르러 그는 타자 앞에 선다. 이미 나는 아무 것도 아니므로 우리의 만남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안다고 하지 말라고 냉정하게 명령한다. 나 또한 너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연에서 `너' `당신' `그대'를 바꾸어서 사용하며 두 번씩, `행복' `사랑'을 한번씩 쓰고 있는 것은 다소 난해한 이 시를 폭넓게 이해하는 단서가 될 것이다.

 

 누군가 가슴에 응어리진 욕지기를 대신 퍼부어줄 때 대리만족의 쾌감을 느끼듯 그의 시는 자신을 찌르면서 다른 이들을 처절한 쾌감으로 인도한다. 세상의 모든 위선을 향해 말랑한 선심을 향해 쉬운 길로만 걷고 싶은 비굴한 오늘 나의 발자국을 향해 침을 뱉는다. 이 시를 공감하며 읽는 독자들의 감정은 자학적일 것이다.

 숙명여대가 있는 청파동……. 20년 전의 청파동 언덕에서 서울역 방향으로 가는 언저리는 하숙집이 많았다. 소나무 숲이 넓은 효창공원은 달밤이 좋았다. 하숙집 아주머니가 차려놓은 아침상에는 계란부침(후라이)이 늘 있었다. 눈이 내린 아침, 미끄러지지 않으려 걸어가는 출근길에 보이는 대우센터 빌딩은 괴물같이 보였다. 숙명여대 아래편의 세실당성당의 오르간 소리가 귓전에 선하다. 지금 청파동은 예전 모습 그대로 일까? 서울의 중심부가 한 눈에 보이는 청파동. 눈 오는 저녁 길과 숨찼던 고개. 세상의 청파동을 아직도 기억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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