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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가을비 / 신경림

by 언덕에서 2009. 10. 9.

 

 

 

 

가을비
                                                        신경림
 


 

젖은 나뭇잎이 날아와 유리창에 달라붙는

간이역에는 찻시간이 돼도 손님이 없다

플라타너스로 가려진 낡은 목조 찻집

차 나르는 소녀의 머리칼에서는 풀냄새가 나겠지

오늘 집에 가면 헌 난로에 불을 당겨

먼저 따끈한 차 한 잔을 마셔야지

빗물에 젖은 유행가 가락을 떠밀며

화물차 언덕을 돌아 뒤뚱거리며 들어설 제

붉고 푸른 깃발을 흔드는

늙은 역무원 굽은 등에 흩뿌리는 가을비

 

 

- 시집 <쓰러진 자의 꿈> (창비 1994)

 

 

 

 

 

 

 

 

 

 

 

 

 

신경림(申庚林) 시인(1935 ~ )의 여섯번째 시집 <쓰러진 자의 꿈>를 읽다가 찾아낸 시이다. 위의 시는 시인이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쓴 작품이다. 인생과 사물을 바라보는 원숙함과 달관의 경지가 돋보이는 한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연상시키는 수작이다. 그가 이 시집을 통해 도달한 결론 중의 하나는 세상살이에 대한 시적 탐구가 결국 자기자신에 대한 탐구와 동떨어질 수 없다는 점이라고 한다. 이 말은 자기자신을 겸허하게 돌아보지 않는 문학은 그것이 제 아무리 거창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진실을 담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자신이 살아온 삶의 무게와 깊이로 감당하기 어려운 말과 언어를 남발하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생각한다면 부단한 자기성찰의 중요함을 우리는 깨달을 수가 있다. 위의 시는 서러운 삶을 살아온 이들의 인생 풍경이 서경적인 운치로 그려져 있어 '절제되어 있는 슬픔'을 감동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그의 시는 주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쓸쓸한 삶을 되짚음으로 해서 우리 사회의 내면을 돌아보고 있다. 이 시집에 등장하는 '늙은 역무원', '늙은 모녀' 등의 형상이 그것이다. 이들의 슬픔은 이미 분노나 격정을 지나온 것이다. 이러한 풍경 너머에는 '절제되어 있는 슬픔만이 유일한 형식으로 남는다.

 

 시집의 말미에서 그는 ' 최근 나는 시는 근본적으로 자기탐구요, 시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많이 하지만, 쓰러지는 자들, 짓밟히는 것들의 상처와 아픔을 어루만지고 흩어지는 것들, 깨어지는 것들을 다독거리는 일, 이 또한 내 시의 숙명인지 모르겠다.'고 매듭을 지었다. 쓸쓸한 가을비가 내리는 저녁, 따뜻한 차 한 잔을 탁자에 놓고 눈을 감고 이 시를 감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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