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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편지 - 어머니에게 / 박영근

by 언덕에서 2009. 10. 8.

 

 

편지 - 어머니에게

 

                                          박영근

 

새떼들이 날아가고 있어요, 어머니

들판의 가득한 벼 포기들도 오늘은

내 앞에서 자꾸만 흔들리고 있어요. 보고 싶은 어머니

만나야 할 얼굴들도 웬일인가요

고개 숙이고 내가 없는 곳으로

더 먼 곳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요

가위질에 부르튼 손마디는 더 시리고

자꾸만 어디선지

눈물이 나네요, 어머니

외롭습니다.

 

 

 

- 박영근 시선집 <솔아 솔아 푸른 솔아> ( 도서출판 강 2009)

 

 

박영근 시인은 1958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1981년 <反詩> 6집에 「수유리에서」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취업공고판 앞에서>, <대열., <김미순傳>,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 <저 꽃이 불편하다> 등이 있으며, 1994년 신동엽창작기금을 수혜하고, 2003년 백석문학상을 수상했다. 2006년 5월 결핵성 뇌수막염과 패혈증으로 타계했다.

 

 이 시를 읽으니 편지를 써본 적이 언제였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시에서 흐르는 절절한 그리움에 눈물이 난다. 만나야 할 얼굴들이 고개 숙인 채 내가 없는 더 먼 곳으로 가야만 하는 세상……. 이 글을 쓴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시를 ‘사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는 시를 누군가를 의식하여 객체를 대상화하여 해석하고 평가하여 글쓰기 이들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시인은 곧바로 시 내부로 깊숙이 파고들어 시의 깊은 움직임과 교감하며 그것을 절제된 언어 속에 담아내지 않았을까?  이렇게 해서 탄생한 한편한편의 글들이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상식과 교과서적 해석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었던 ‘진실한 내밀함’ 이다. 그것은 이론이나 외적 규정이 섣부르게 시의 해석에 끼어드는 것을 경계하는 살아있는 글이다. 시 한 편을 온전하게 표현하기 위해 펼쳐진 노력들은 곧바로 우리를 깨끗하고 정직한 심성으로 안내한다. 무엇보다도 그의 심미적인 문장들은 시적 영혼의 고백과 반응하면서 읽는 이들이 뿜어내는 숨결과 호흡을 같이하는 드문 경험을 선사한다. 거기서 우리는, 낱낱의 시들이 내밀한 고민 속에서 탄생하는 과정을, 그 시들이 그 나름의 깊이와 그늘 속에서 비상하고 꿈꾸는 여정을 지켜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위의 시를 쓴 시인은 세상을 이기지 못했지만 그가 남긴 시는 빛과 소금이 되어 세상에 남았다. 마흔여덟의 생애를 겨울 산정에 서 있는 한 그루 외로운 나무처럼 살다간 아름다운 사람이다.

 

 이 시를 읽을수록 외로움과 사무치는 그리움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시인이 작시해 국민가요가 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노래에 흐르는 분위기보다 더 깊고 처연한 눈물이 흐른다. 일렁이는 황금빛 물결 위로 새떼들이 날아오르는 결실의 계절이다. 가을이 깊을수록 갈 곳 없는 고적한 마음, 아아 , 외롭고 쓸쓸해서 터져 나오는 어머니라는 이름! 어머니, 아들은 이제서야 철이 드는지 눈물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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