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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세월이 가면 / 박인환

by 언덕에서 2009. 10. 7.

 

 

세월이 가면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을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이름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시집 <박인환 시선집>(산호장 1955)

 

 

 

 

 

 

 

 

 

 

 

 

 

이 시는 박인환 시인(1926 ~ 1956)의 시작 활동 마지막 시기의 것으로 <목마와 숙녀>와 함께 대표작으로 꼽힌다. 작고하기 일주일 전에 쓰여진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명동 어느 술집에서 작가는 이 시를 읊었고, 친구 김진섭이 즉흥적으로 작곡하였다는 에피소드와 함께 노래로도 잘 알려진 작품이다. <목마와 숙녀>와 함께 박인환의 대표적 작품으로, 샹송 스타일의 곡을 붙여 대중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이 시는 낭만적 시의 정수라 할 만하다.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박인환이 불안한 시대 의식과 위기감, 허무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한 잔의 술과 이 같은 낭만적 시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를 우수 어린 시인으로 만든 것은 천부적으로 타고난 감상적 성품이라기보다는 시대적 운명일 것이며, 그에게 <세월이 가면>과 같은 시는 커다란 정신적 위안제가 되었을 것이다.

 이 시는 전쟁을 통해서 맛본 비운과 불안함에서 비롯되는 좌절감과 상실감을 노래하고 있다. 잃어버린 기억을 더듬어 보헤미안처럼 고뇌하고 방황하는 시인의 찢긴 삶의 모습이 도시적 이미지를 통해 간결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 시는 도시적 서정, 도시적 감상주의, 도시적 보헤미안 기질이 절절히 넘치는 작품이다.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대적 배경이 어떠했는가를 파악해야 한다. 6ㆍ25전쟁은 모든 것을 철저하게 파괴해 버렸다. 6ㆍ25전쟁 당시 박인환의 삶이 그러했듯이, 그의 시와 사랑도 이 작품에서처럼 모두 ‘잃어버리고’, ‘사라진’ 그것이었다.

 1955년 환도 후의 황량한 잔해가 명동거리에 그림자를 던지고 있을 때, 그는 이 샹송과도 같은 시를 즐겨 쓰고, 노래불렀다고 한다. 그만큼 시는 그에게 있어 고뇌에 찬 생활의 마지막 보루였고, 고독한 돌파구였던 것이다.

 이 시는 구체적인 이미지 제시를 통하여 시인의 체험의 실체를 보여 주는 대신, '그 사람'이 떠나버린 상실의 아픔과 슬픈 자아의 모습이 전면에 나타남으로써 애상적인 분위기가 주조를 띤다.

 신(神)이 존재한다면 저토록 처참한 전쟁을 묵과했을까? 신을 상실한 시대, 삶의 지향성을 잃은 상황에서 화자 '나'는 가슴에 남은 옛 추억과 아름다운 환상만을 떠올리며 후미진 도심 밖 언저리를 거닐면서 허무에 젖어 있다. 특히, 마지막 연의 '서늘한'은 허무 의식과 상실의 슬픔이 비장감으로 고조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박인환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이 시의 화자 역시 아름다웠던 시절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을 통해 어두운 시대가 안겨 준 상실의 슬픔과 고뇌를 밟으면서 방황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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