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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사향(思鄕) / 김상옥

by 언덕에서 2009. 10. 2.

 

 

 

사향(思鄕)

 

                                김상옥

 

 

눈을 가만 감으면 굽이 잦은 풀밭 길이

개울물 돌돌돌 길섶으로 흘러가고

백양 숲 사립을 가린 초집들도 보이구요.

 

송아지 몰고 오며 바라보던 진달래도

저녁 노을처럼 산을 둘러 퍼질 것을.

어마씨 그리운 솜씨에 향그러운 꽃지짐.

 

어질고 고운 그들 멧남새도 캐어 오리.

집집 끼니마다 봄을 씹고 사는 마을,

감았던 그 눈을 뜨면 마음 도로 애젓하오.

 

 -시집 <초적>(수향서헌(水鄕書軒) 1947)

 

 

* 멧남새 : 산나물

* 어마씨 : 어머니

* 꽃지짐 : 화전(花煎)

* 애젓하오 : 애틋하오

 

 

 

  

 

 

 

 

   

 

위 시조는 고향에 대한 향수를 노래한 3연으로 된 현대연시조이다. 1947년 <수향서헌>에서 간행한 김상옥의 첫 시조집 <초적(草笛)>에 수록되어 있다. 지금 40~50대들은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서 접했을 것이다.

 제목에 주제가 함축되어 있는 이 작품은 고향에 대한 생각을 노래한 현대시조이다. 고향마을의 자연과 인정의 세계를 다양한 심상을 통해 실감나게 묘사함으로써, 각박한 현대인들의 마음속에 잊고 지내던 고향에 대한 향수를 일깨워준다.

 고향의 시골 풍경, 어렸을 적의 소박한 생활, 어질고 가난한 고향 사람들의 생활의 애환을 노래한 이 시조는 눈을 감는 데서 시작하여 눈을 뜨는 데서 끝난다. 달리 말해서 이 작품의 화자는 고향에 대한 회상에 잠기는데, 그 회상 속의 고향이 바로 이 시조의 주요 내용이 된다. 

 

 이 시조는 '향수'라는 전통적이고 토속적인 정서를 향토적인 시어를 통해 현대적 감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현대화된 시조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특히 영탄이나 직설적인 표현을 피하고 다채로운 묘사에 의해 심상을 제시하는 방법으로 고향을 그려낸 솜씨는 현대시조의 차원을 한 단계 끌어올린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호우가 시조에 현대시적 내용을 도입한 공로자라면, 김상옥은 시조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한걸음 발전시킨 공로자라 할만하다.

 그가 즐겨 쓰는 시조의 세계는 한국적 생활과 사상이다. 따라서, 소재를 선인이 끼친 문화재나 역사적 설화 또는 예스러운 몸맵시 따위에서 취하여 한국의 미를 끈질기게 추구하되, 특히 주옥같은 영롱한 시어를 마음껏 구사하여 가구(佳句)로 엮어 놓는다. 한마디로 그의 시는 다분히 낭만적이며 시상은 현대시와 동질하다. 그러나 언어 구사에 있어선 고아(高雅)한 말을 쓰기에 힘썼다. 명상적이고 관념적이며 화려하다.

 

 예향 통영 출신인 초정 김상옥(金相沃) 시인(1920~2004)은 일제시대 때는 항일운동으로 몇차례 투옥당했던 우국지사였다. 1946년 이후 삼천포ㆍ부산ㆍ마산 등지를 전전하면서 교원생활을 계속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섬세하고 영롱한 언어를 잘 구사하는 이 시인은 시조로 출발, 해방 후에는 시조보다 시쪽에 기울면서 1963년경부터 시조를 3행시라고 주장했다. 1959년 경남여고 교사를 거쳐 상경, 표구사(表具社) [아자방(亞字房)]을 경영했다.

 김상옥 시인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화랑에 그림을 보러 갔다가 넘어져 다리를 다친 뒤 휠체어에 의지해 생활했다. 부인의 극진한 간병과 보살핌을 받아왔는데, 부인이 먼저 세상을 뜨자 충격으로 식음을 전폐했으며 부인의 장례식이 끝난 지 이틀만에 이승을 떠났다. 노시인은 부부의 깊고 애틋한 정을 시작품과 함께 세상에 남기고 떠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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