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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 김영랑

by 언덕에서 2009. 10. 5.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김영랑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붙은 감닙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 <시문학> ( 창간호(1930. 3))

 

 

 

 

 

 

 

 

 

 

 

 

 

 

'모란이 피기까지는 /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이라는 시로 기억되는 김영랑 시인(1903 ~ 1950)의 또다른 서정시이다. 이 시는 계절의 변화에 대한 감탄과 놀라움, 두려움이 토속적 방언의 가락 속에 녹아있는 아름다운 글이다. 우선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가지의 어휘부터 이해하여야 할 것 같다.

<오매> : '어머나'의 전라도 사투리.

<장광> : 장독대.

<기둘리니> : '기다리니'의 전라도 사투리.

<자지어서> : '잦아지어' 또는 '잦아서, 빠르고 빈번하여'의 전라도 사투리.

 

 김영랑은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빠짐없이 나오는, 193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특히 사라져가는 우리의 고유어를 발굴하고 향토어인 방언을 널리 사용하였으며 독창적인 조어를 활용하는 등 국어의 심미적 가치를 개발한 시인으로 평가된다. 그의 서정과 시어의 미적 구조에 대한 인식은 생경한 관념이나 도식적인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시를 예술적 차원으로 상승시키는 데 공헌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1930년대라는 식민지 상황에서 시대의 고뇌와 현실인식이 철저히 배제된 채 정제된 언어와 박제된 조선의 혼을 여성적 어조로 읊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김영랑의 시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하는 주제 의식이 약한 면이 있지만 아름다운 가락과 섬세한 정서만으로도 훌륭한 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시에서는 운율, 정서, 언어적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이 요구된다. '오매 단풍 들겄네' 라는 전라도 방언의 리듬있는 구사가 독특한 청각영상을 형성하는 것이 이 시의 특징이다. '장광, 골불은 감잎, 누이, 추석, 바람'의 이미지와 각 연의 시작과 끝에 이어지는 사투리가 결합하여 가을의 이미지를 감각적으로 나타낸다.

 

 갑자기 여름이 사라지고 추석이 오고 또 가버렸다. 계절의 빠른 변화에 대한 감탄과 놀라움, 바람이 잦아 농사를 망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오매 단풍 들겄네'에 함축되어 감칠맛나게 녹아 있다. 친근한 사물들의 등장은 따뜻한 정서를 유발하고, 부드럽고 리듬있는 운율은 향토적인 묘미를 더해준다. '감각과 이미지와 리듬의 유려한 결합이 빚어낸 언어미학의 성취'라는 평을 받는, 김영랑의 대표작 중의 하나이다. 이 시의 핵심은 천진난만한 누이와 '나'의 대조적 심리에 있다. 누이는 장독대 위의 감나무를 쳐다보고 아름다움에 도취하여 '오매 단풍 들것네'(어머나 단풍들었네)라는 감탄을 연발한다. 반면에 '나'는 며칠 남지 않은 추석에 할 일을 생각하고, 가을바람에 잦아지니 더 추워지기 전에 해야 할 일을 걱정하고 있다. 즉, 누이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기는 '순진한 영혼'이요 천진한 감성의 인물인 데 비해, '나'는 그러한 심성으로부터 멀어진 생활인이요 성인(成人)이다.

 그러한 대조적 모습 속에서 이 시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누이의 맑고도 천진한 감성의 아름다움이다. 이런저런 일거리나 걱정을 모두 잊어버리고 단풍의 아름다움에 놀라고 기뻐하는 누이의 소박하고도 순진한 모습―그 모습 속에서 '나'는 스스로 잊고 있었던 아름다운 심성의 반짝임을 발견하는 것이다.

 

 결국 '누이'의 마음을 단풍 들게 하는 것은 감잎이고, '나'의 마음을 단풍 들게 하는 것은 누이가 되는 셈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감잎→누이→나'로 연결되는 묘한 동화(同化) 관계를 읽어 낼 수 있게 된다. 주제는 다르지만, 낙엽과 누이와 나라는 이 삼자의 관계가 재미있게 설정되어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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