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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by 언덕에서 2009. 10. 6.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낡은 무명 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시집 <백석 시전집> (창비, 1999년(백석/저, 이동순/편) )

 

 

 

 

 

 

 

 

 

 

 

 

  

시인 백석(1912 ~ 1963?)은 본명이 백기행으로서,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오산학교를 졸업했다.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그 모와 아들’이 당선되어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리고 조선일보사 사장 계초 방응모 선생의 지원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가, 일본 야오야마학원(청산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입사했다. 백석이 필명으로 석(石)이라고 지은 것은 일본의 시인 이시카와 다꾸보꾸(石川啄木)를 좋아해서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친구 허준의 결혼피로연에서, 평생 구원의 여인으로 남게 되는 통영 출신의 난(蘭)이라는 여성을 만난다.(후일 난은 백석의 친구인 조선일보 기자 신현중과 결혼하게 된다) 이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흥영생고보 영어교사로 부임하여 제자들을 길러냈는데, 그때 김영한이라는 기생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기명이 진향으로서, 조선정악계의 대부이던 하규일 문하에서 궁중무를 배우고, 삼천리라는 잡지에 수필을 발표하기도 한 인텔리 여성이었다. 그녀는 최근 몇년전 법정스님에게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희사하여 길상사라는 절로 사용하도록 만들었던 이로 백석이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에서 따와 ‘자야(子夜)’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한동안 동거를 했다고 전해진다. 남한에서 잊혀진 백석의 시집을 편집 / 발행케 한 장본인이다.

 이 시에서 화자의 처지와 정황은 매우 슬프다. 스스로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하다고 토로한다. 좁은 방에 누워 희미한 불빛, 서글픈 느낌을 자아내는 차갑고 흰 벽을 쳐다보며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삶을 떠올려 보고 있다. 어렵게 살아가는 늙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설령 삶이 힘들지라도 좌절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가장 귀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하늘이 낸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의 삶을 수용하고 있다. 요컨대 이 시는 불행한 시대를 살았던 우리 모두의 자화상을 기억 속의 희미한 영상에 담아낸 영상시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시인은 허름하고 낡은 토굴 같은 낡은 방에서 흰 바람벽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영사기가 돌아가는 것처럼 갖가지 풍경이 영화 화면처럼 흰 바람벽에 그려진다. 당시, 그의 처지는 ‘때글은 다 낡은 무명셧츠’ 라는 표현에서 확실히 볼 수 있다. 시인이 이 시를 지은 시기는 그야말로 시퍼러둥둥하게 매서운 만주벌판의 추위 속에서, 따뜻하고 달디단 감주가 먹고 싶어지던 때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지치고, 외로운 시기에 흰 바람벽 앞에 선 시인에게 스쳐지나가는 첫 번째 모습은 가난하고, 늙은 어머니의 모습이다. 아들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외롭고 고달프고 힘들 때, 위안이 되어주는 종교와도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어머니를 떠올리니, 실제로 떠오르는 이미지는 어머니가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우며 배추를 씻고 있는 모습이다. 뜨근뜨근한 구들장에서 평온하게 있는 어머니를 떠올리지 못하고, 왜 엄동설한에 김장을 하고 있는 불쌍한 어머니 모습일까? 시인의 마음이 춥고 외롭고 지쳤기에 그런 이미지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어머니와 사랑하는 사람이 화면을 스치고 지나간 후, 흰 바람벽이라는 화면에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무엇이 비쳤을까? 그는 먼저 주관적인 모습인 자신의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면서 현재의 처지를 표현하는 온갖 수식어를 사용한다.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살아가도록 태어났고, 그런 처지로 살아가는 자신의 가슴은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 것이 비쳐졌다고 노래했다. 개인의 시각에서 출발하여 하늘의 시각에서 흰 바람벽에 스스로를 위로하듯 조용히 이야기하고 있다.

 김기림은 백석시집 '사슴' 독후감에서 '백석(白石)의 시에서 우리는 아무런 회상적인 감상주의도, 부어오른 복고주의도 만나지 않아서 유쾌하다. 백석은 우리를 충분히 이상적이게 만들 수 있는 세계를 주무르면서도 그것 속에 빠져서 어쩔 줄 모르는 것이 얼마나 추태인가 하는 것을 가장 절실하게 깨달은 시인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시집 <사슴>은 그 외관의 철저한 향토미각에도 불구하고 주책없는 일련의 향토주의와는 명료하게 구별되는 치열하고 비타협적인 '모더니티'를 품고 있는 것이다.'라며 감상성이 배제된 치열함을 극찬했다.

 해방 직후 만주에서 고향인 평북 정주에 돌아온 그는 당시의 남북 현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꿈을 가졌던 백석에게는 남한이나 북한이나 큰 차이가 없었는지 모른다. 결국 그는 6.25 이후에도 남하하지 않고 삼팔선 이북에서 활동했다. 그는 본래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시 쓰기를 버리고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등을 번역하는 한편, 동시나 동화를 발표했다고도 한다. 1957년에 나온 <집게네 형제>는 시의 형식을 빌린 동화시집으로 혁명이나 계급의식보다 휴머니즘을 고양하려는 글들이 주로 실려 있다.

 이런 경향이 북한 내부의 당파 분쟁에 겹쳐 백석은 1958년 사실상 숙청되어 삼수군에 있는 국영협동조합으로 내려가 양치기 일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1962년 북한의 문화계 전반에 내려진 복고주의 비판과 연관되어 마침내 창작 활동을 중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를 읽다가 떠오르는 것은 수십 년 전의 여인숙 풍경이다.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옛날 여인숙은 두개의 방이 하나의 등불을 공유하던 시절이 있었다. 일반 집도 방을 나란히 하고 하나의 등불을 공유하곤 했다. 전기세가 비싼 탓이었다. 60촉 전등이 대부분이었는데 15촉 전등은 드물었다. 그러나 사라진 15축 전등은 우리의 과거를 기억시켜주는 하나의 상징이다. 경상도에는 '비름빡'이라는 말이 있다. 유년시절 잠자리에 들기 전에 비름빡에 껌을 붙이고 나서 다음날 떼어 먹던 기억이 난다. 그 비름빡이 흰 바람벽으로 해서 백석의 시에서 살아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