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외국 현대소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단편소설 『픽션들(Ficciones)』

by 언덕에서 2009. 9. 2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단편소설 픽션들(Ficciones) 

 

 

 

 

아르헨티나 시인·소설가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1899 ∼ 1986)의 단편소설로 1944년 발표되었다. 단편소설집『픽션들』은 보르헤스의 사상과 문학적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단편집으로 17편의 짧은 단편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생각의 힘이 세상과 사물을 만들어 낸다는 이야기도 있고, 시간은 한줄기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갈래가 그물처럼 엉켜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가 하면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를 20세기 프랑스인이 썼다면 그 작품의 의미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또한 우주를 거대한 도서관에 비유한 이야기도 있다. 특히 도서관 이야기는, 움베르토 에코가 쓴 <장미의 이름>의 모티프가 되는 작품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 보르헤스가 계속 강조하는 것은 이 세상이 미궁이라는 사실이다.

 1961년 사뮈엘 베케트와 함께 권위있는 포멘토상을 받은 후, 그의 소설과 시는 점차 20세기 세계문학의 고전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이전까지 보르헤스는 자신의 고향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다른 작가들은 그를 단지 기교와 재주를 지닌 장인(匠人)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다. 그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그가 '창조해낸' 악몽의 세계는 프란츠 카프카의 세계에 필적할 만한 것이라는 평을 받았고 일반적인 언어를 가장 지속성 있는 형태로 응축시킨 작가로 높이 평가되었다.

 

 

아르헨티나 보르헤스 보르헤스 (J. L. Borges, 1899~1986)

 

 

 단편집 『픽션들』에 실련 소설 중 '원형의 폐허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도인'으로 설정된 인물은 자기의 관념 속에서 한명의 소년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다시 말해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 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도인은 많은 노력을 기울여 정말 자신의 충실한 한 명의 소년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러고 나서는 그 소년을 교육시킨다. 교육을 마친 도인은 소년을 남쪽에 있는 사원으로 보내게 되는 데, 어느 날 그 소년이 불에 들어가서도 타지 않는다는 말을 전해 듣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날 도인 자신도 불 속에 들어가도 뜨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도인은 자기 자신도 누군가의 꿈 속에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이야기는 끝이 난다.

 

50대 중반에 실명한 보르헤스의 대형사진 앞에 선 마리아 코다마. 그녀는 30여년 동안 보르헤스의 눈이 되어 주었다.<사진 출처 : 조선일보>

 

 세르반테스 이후 스페인어권 최고의 문제작가로 일컬어지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단 한 편의 장편소설도 쓰지 않았다. 대신 『픽션』으로 명명한 단편에서 작가로서 희구하는 모든 것을 치밀하게 요약해 냈다. 『픽션들』(1944)은 보르헤스 문학의 본령으로 간주되는 두 번째 단편집으로 그의 주된 관심사인 자아와 시간의 문제를 천착한 열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문고판으로 200쪽밖에 안 되는 철학적 문학적 사유가 온축된 이 작품집은 예기치 못한 폭발력으로 들뢰즈, 푸코, 데리다 등의 후기구조주의 사상가들과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을 비롯한 20세기 후반의 서구 지성계를 흔들었다. 이 책이 불러일으킨 지적 충격은 이성주의의 한계에 대한 예리한 통찰과 소설을 무한한 사유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새로운 소설 문법의 창안에서 비롯됐다.

 

 

 보르헤스는 새로운 세계 인식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도발적 사유를 통해 탈근대 담론의 지적 경향을 선취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21세기 인문학 패러다임의 출발점에 위치시킨다. 철학과 문학의 경계적 글쓰기를 보여 주는 그의 픽션은 흔히 경험세계의 재현이 아니라 관념적인 허구의 세계를 다룬 ‘지적인 가설’로 여겨진다. 실제로 『픽션들』에 실린 많은 단편은 가상의 텍스트에 대한 주석으로서의 글쓰기라는 메타픽션적 성격을 지닌다. 『픽션들』은 지배적 가치체계의 전복을 통해 세계의 질서를 재정의하고 글쓰기와 언어 자체에 대해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물음을 던진다는 점에서 환상문학의 형이상학적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여기에서 작가는 초월과 무의미의 순수한 유희를 벌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유기적이고 총체적인 질서로 파악해 온 상투화된 현실 개념에 대한 근본적 회의와 자기반성을 통해 경험 세계 너머로 인식의 지평을 넓힘으로써 더욱 심오하게 현실에 관여한다. 그러나 복잡한 추상과 심오한 형이상학에도 불구하고 보르헤스에게 관념 자체는 심미적 상상적 가능성만큼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형이상학 역시 ‘환상문학의 한 분파’이며 그것이 내세우는 객관진리라는 것도 실상 상상력의 산물로서 ‘우주에 대한 그럴싸한 묘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픽션들』에서 보르헤스는 이념적 테제가 아니라 철학의 존재 의미 자체를 회의케 하는 급진적인 유희성을 통해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