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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구절초 시편 / 박기섭

by 언덕에서 2009. 9. 16.

 

 

 

구절초 시편

 

                                     박기섭


 

찻물을 올려놓고 가을 소식 듣습니다

살다 보면 웬만큼은 떫은 물이 든다지만

먼 그대 생각에 온통 짓물러 터진 앞섶

못다 여민 앞섶에도 한 사나흘 비는 오고

마을에서 멀어질수록 허기를 버리는 강

내 몸은 그 강가 돌밭 잔돌로나 앉습니다

두어 평 꽃밭마저 차마 가꾸지 못해

눈먼 하 세월에 절간 하나 지어놓고

구절초 구절초 같은 차 한 잔을 올립니다

 

 

- 시조집 <비단 헝겊> (태학사 2001)

 

 

 

 

 

 

 

 

 

 

 

 

 

 

 

구절초는 9월 ~ 10월이면 우리나라 산하를 수놓는 들꽃이다. 보통 들국화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꽃, 구절초, 쑥부쟁이……. 가을에 산을 오르거나 들을 지니면 구절초를 꼭 보게 된다. 그런데 걸핏하면 시기를 놓쳐서 꽃잎이 시들어갈 때서야 구절초 마중하러 갈 때가 많았던 것 같다. 올 가을에는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할 텐데……. 하늘이 너무 맑고 푸르러서 눈이 아픈 가을날, 박기섭 시인(1954 ~ )의 시조로 구절초를 만나본다. 파란 가을 하늘에 하늘거리는 구절초를 그려본다.

 

 필자는 중. 고교 시절 국어시간에 수많은 시조를 접했으면서도 '현대시'라는 자유스럽고 세련된 장르가 있는데 틀에 박혀있는 듯한  고리타분한 시조가 왜 있어야할까 하고 늘 의아해했었다. 그러한 선입견을 깨게 해주신 분은 고3 시절의 담임선생님이셨다. 수업시간에는 엄격하셨지만 제자들과의 일대일 대면에서는 한없이 자애로우시며 성실하셨던 아버지뻘 나이의 선생님이 시조시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졸업 후 십수 년이 훨씬 지난 후였다. 나에게 시조가 좋아지게 된 것은 '시조' 자체의 매력보다는 존경하는 선생님이 시조를 쓰셨다는 데 기인한다는 게 맞는 말 같다. 시조는 원래 고려 중기 때 생겨난 걸로 알려져 있다. 시조가 융성한 때는 조선이 건국되면서 부터이다. 조선 초기에는 상류계급인 양반 중심으로 퍼져갔다가 임진왜란 이후부터는 양반 외에 중인을 중심으로 서민층으로 확산되었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최남선을 통한 시조부흥운동을 거쳐서 이태극 등의 창작을 통한 현대시조로 탄생되었다.

 

 지나치게 서구화된 문학 형식에 대한 반성으로 민족적 시형식인 시조를 다시금 창작하자는 시조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 이후부터 장을 현대시의 연으로 배행하는 장별 배행 시조 등의 형식으로 변화했다. 이러한 전통을 바탕으로 우리 겨레의 얼이 담긴 운율과 형식을 우리글에 담은 전통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신문사에서 해마다 열리는 문학작품의 등용문인 신춘문예에서는 시조부분을 두고 있는 것은 나름대로 깊은 뜻이 있는 걸로 여겨진다.

 

 하얀 구름, 파란 하늘, 노을 진 하늘 색깔 닮은 구절초, 쑥부쟁이, 들국화 꽃 피어나며 가을을 부르고 있는 계절이다. 바람에 하늘거리며 앞섶 풀어 이 땅, 우리 땅의 순정한 빛깔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가을날 찻물 올려놓고 가을 소식 듣는 시조는 참으로 그윽하기 그지없다. 씁쓸하면서도 뒷맛이 개운한 구절초 같은 가을차 한 잔 얻어 마시며 여름 내내 삶에 헤진 마음자리를 추스리면 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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