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詩)를 읽다

관계 / 고정희

by 언덕에서 2009. 9. 12.

 

 

 

 

 

관계 

 

                                  고정희  
 

싸리꽃 빛깔의 무당기 도지면

여자는 토문강처럼 부풀어

그가 와주기를 기다렸다

옥수수꽃 흔들리는 벼랑에 앉아

아흔 번째 회신 없는 편지를 쓰고

막배 타고 오라고 전보를 치고

오래 못 살 거다 천기를 누설하고

배 한 척 들어오길 기다렸다

그런 어느 날 그가 왔다

갈대밭 둔덕에서

철없는 철새들이 교미를 즐기고

언덕 아래서는

잔치를 끝낸 들쥐떼들이

일렬횡대로 귀가할 무렵

노을을 타고 강을 건너온 그는

따뜻한 어깨와

강물 소리로 여자를 적셨다

그러나 그는 너무 바쁜 탓으로

마음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미안하다며

빼놓은 마음 가지러 간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여자는 백여든아홉 통의 편지를 부치고

갈대밭 둔덕에는 가끔가끔

들것에 실린 상여가 나갔다

여자의 희끗희끗한 머리칼 속에서

고드름 부딪는 소리가 났다

완벽한 겨울이었다


- 시집<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창작과비평사 .유고시집 .1992)



 *토문강 : 백두산 천지에서 시작하여 북으로 흐르는 쑹화강의 지류

 

 

 

 


 

 

 취재차 지리산 등반 중 불의의 실족사고로 숨진 고정희 시인(1948 ~ 1991)은 생전의 시 작업에서 냉철한 현실 비판 의식과 미학적 성취를 함께 갖춘 탁월한 문인이었으며, 1980년대 중반 이후 [여성해방문학]을 중심으로 여권 신장 운동에도 족적을 남긴 분방한 사회 활동가였다.

 기독교적인 세계관과 고향인 전남 해남의 남도 정서를 담은 첫 시집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 이 있으며, 이후 연시집 <아름다운 사람 하나>에 이르기까지 8권의 시집을 남겼다.

 그 중 장시집 <초혼제>는 남도의 판소리 가락을 녹여냈으며, 1989년에 펴낸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에는 ‘어머니’를 축으로 여성 해방의식을 집중적으로 표출했다. 미학적 성취를 이루면서도 그의 시는 기존의 여류시에서 자주 지적되던 애잔함이나 섬세한 파문에 의존하기보다는 장중하고 웅혼한 문체를 보여 ‘우리 시대에서 가장 남성적 리듬’을 갖고 있는 여류시인으로 평가됐다.

 미혼이면서도 독신주의를 고집하거나 자폐적이지 않았고 건강한 인간관계를 추구한 그는 개인적 고독을 분방한 사회 활동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시대의 불행을 견뎌내며 살아가는 이웃을 향한 무한한 사랑을 우리 민족의 설화와 역사에 깊이 연계된 상상력으로 힘 있게 노래한 시인이었다.

 대표시집 <초혼제>는 5ㆍ18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남도가락과 씻김굿 형식을 빌려 민중의 아픔을 위로한 장시집(長詩集)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강한 의지와 생명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노래하였던 것이다.

 위의 시 '관계'는 전반적으로는 잔잔하지만, 읽다보면 어느새 폭풍 같은 숨결로 가슴을 휘젓는다. 한 편의 잘 정제된 단편소설을 읽는 듯한 착각을 줄 정도로 스토리 구성이 단단하며 세련되고 아름답다. 아니, 너무 아름다워서 슬프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사회활동가로서 이념들을 내세워서 읽기 거북했던 대자보(字報)조의 구호를 내세운 시들은 거칠고 투박해서 읽기가 영 부담스러웠다. 위의 시 ‘관계’를 읽으면서 '이 시가 고정희의 시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을 정도이다. 이 시에는 한국적이고 토속적인 이미지가 계속적으로 펼쳐진다. 이 이미지만으로 잃어버린 '우리 것'들을 고스란히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싸리꽃, 둔덕, 막배, 토문강, 잔치를 끝내고 일렬횡대로 귀가하는 들쥐떼…. 섬세한 우리말에 실린 이미지들은 매우 토속적이며 동시에 현대적이다. 마치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는 시인의 직접적인 감정이입이 절제된 채 조용하게 전개된다. 그 속에서 미안하다며 빼놓은 마음 가지러 간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이후 어긋난 관계가 나타나며, 그것을 해결해주는 자연의 숨결이 어른거리는 눈부신 시이다.

'시(詩)를 읽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동(貞洞) 골목 / 장만영  (0) 2009.09.15
비 / 김수영  (0) 2009.09.14
행복(幸福) / 유치환   (0) 2009.09.11
하(河) / 이호우  (0) 2009.09.10
님의 침묵(沈默) / 한용운  (0) 2009.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