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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정동(貞洞) 골목 / 장만영

by 언덕에서 2009. 9. 15.

 

 

 

 

정동(貞洞)  골목 

 

                                                          장만영

 

 얼마나 우쭐대며 다녔었냐.

 이 골목 정동 길을

 헤어진 교복을 입었지만,

 배움만이 나에겐 자랑이었다.

 

 도서관 한구석 침침한 속에서,

 온종일 글을 읽다,

 돌아오는 황혼이면,

 무수한 피아노소리

 피아노소리 분수(噴水)와 같이 눈부시더라.

 

 그 무렵

 나에겐 사랑하는 소녀(少女) 하나 없었건만,

 어딘가 내 아내 될 사람이 꼭 있을 것 같아,

 음악 소리에 젖는 가슴 위에

 희망은 보름달처럼 둥긋이 떠올랐다.

 

 그 후 20년

 커다란 노목(老木)이 서 있는 이 골목

 고색창연한 긴 기와담은

 먼지 속에 예대로인데,

 지난날의 소녀(少女)들은 어디로 갔을까.

 오늘은 그 피아노소리조차 들을 길 없구나.

 

 - 시집 <밤의 서정> (정양사 1956 )

 

 

 

 

 

 

 

 

 

 

 

장만영 시인(1914∼1975)이 1956년에 출간한 시집 <밤의 서정>에 수록한 작품이다. 농촌과 자연을 소재로 현대적 감성으로 그림 같은 선명한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이 그의 시의 특징이다. 그는 동심에 가까운 순수한 서정으로 많은 시를 남겼다. 그의 시세계는 자연과 현실 경험을 모티브로 한 정적인 인간관을 주축으로 하는 의식세계이다. 스타일면에 있어서는 모더니즘의 한 유파인 이미지즘적 요소를 가미한 알기 쉬운 언어로 형상화하였다. 그러나 이 시는 그 소재가 도회지, 도회지하고도 서울의 중심인 정동이다.

 

 서울시 중구 정동……. 덕수궁이 있고 이화여고가 있는 그 동네……. 이제 40대에 들어선 시인이 학생시절에 날마다 오고가던 ‘정동 골목’을 지나며 옛날을 회상해 보는 그리운 추억의 노래이다. 덕수궁을 낀 정동은 지금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명소로서 깨끗하지만 시인이 고등학생이던 1930년대에도 그랬나 보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나이가 들면 사랑은 가고 추억만 남는다. 그만큼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나이인 중년 초입에 접어든 시인은 지난날 이 골목에서 나던 피아노 소리며, 날마다 마주치던 책가방 든 단발머리 소녀들을 떠올리고 있다. 이 시는 눈에 보일 듯이 선하게 과거의 추억과 현실간의 적막감을 가슴 아프게 소묘하고 있다. 비록 가난했지만 배움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 찼던 학창 시절, 도서관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돌아오던 정동 골목길에서 한 소녀가 쳤을 것으로 짐작되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이성에 대한 순수한 희망에 젖어들던 때를 기억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20년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커다란 노목’처럼 시간이 흘러 시인이 다시 찾은 정동 골목은 ‘기와담’은 그대로인데, 그 옛날의 ‘소녀, 피아노 소리’와 아름다운 희망은 찾을 수 없음에 진한 그리움과 상실감을 느낀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인은 무상감과 허망함을 담담하고 처연한 톤으로 적어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장만영 시인은 1975년 위암 진단을 받았고 그 해 10월 8일 새벽 2시 반 급성췌장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에 남기고 간 시집은 미간행된 시집까지 모두 8권이었다고 한다. <양(羊)>, <축제>, <유년송>, <밤의 서정>, <저녁 종소리>, <장만영시선집>, <등불 따라 놀 따라> (미간행), <저녁놀 스러지듯이>가 그것인데 시집을 낼 때마다 제목의 글자가 한자씩 늘어가고 있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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