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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바다가 보이는 산길 / 김윤성

by 언덕에서 2009. 9. 18.

 

 

 

 

바다가 보이는 산길

 

                                                 김윤성

 

바다가 보이는 산길이 난 좋아,

엉겅퀴, 들장미 피는 유(六)월 녹음 밑에 앉아 바라보는

바다가 난 좋아,

 

한잠 들고 깨어봐도 그 자리 그 곳에

오도 가도 염(念)도 않는 범선(帆船) 두어 개,

 

먼 먼 바위섬엔

부서지는 파도성(波濤聲)이 들리지 않아

고요히 피었다가 사라지는 흰 물살들이

아직도 꿈속인 양 아물거리는

유(六)월 바다가 보이는 산길이 난 좋아.

 

 

 -시집 <바다가 보이는 산길> ( 춘조사 1956)

 

 

 

 

 

 

 

 

 

 김윤성 시인(1926 ~ )의 시집 <바다가 보이는 산길>은 장만영ㆍ박남수 등의 주선으로 1956년 [춘조사(春潮社)]에서 간행한 시집이다. 해방 직후부터 1950년대 전반기까지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작품의 집필 연대는 6ㆍ25전쟁 이전의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6ㆍ25전쟁 이후에는 현실 상황의 급박성 때문에 작품을 많이 쓰지 못한 때문이다. 그 초기의 작품들이 쓰여질 무렵에는 청록파적인 서정주의가 그 당시 신인들에게는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집의 수록 작품들은 그와는 달리 지적인 태도로 형이상학적인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김윤성의 말대로 발레리와 릴케의 영향을 받아, 주로 만물의 윤회를 지각(知覺)한 형이상학적 고민과 비애를 노래한 것이 이 무렵의 작품세계이다.

 

 6월의 자연은 아름답다. 6월의 산길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을 시인은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필치로 담아내고 있다. 담백하고 맑은 시어는 잔잔한 바다와 초여름의 싱그러운 정취를 전달하기에 충분하다. 시를 읽으면서 바다와 먼 바위섬을 향하여 하얀 화폭을 펼쳐들고 그림 그리는 이를 상상하여도 좋을 것이다.

 시인이 서 있는 자리는 바다와 먼 바위섬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산길이다. 인공적인 손길이 닿지 않고 엉겅퀴와 들장미가 피어 있는 산길은 물결이 반짝이는 바다를 감상하기에 좋은 곳이다. 한참을 바라보아도 움직이지 않는 범선은 여유로운 바다의 풍경을 더해준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바람을 조절하여 띄우는 배가 범선이다. 범선은 기계의 동력을 이용한 빠르고 거대한 배보다 조용하고 자연에 친근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바람을 안고 부푼 범선의 돛은 바다를 향한 꿈과 희망을 상징하고 있다. 파도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바닷가는 삶의 어려움이 배제된 순수한 아름다움의 공간이다.

 

 바다와 산길은 삶의 고단함이 배어들지 않은 순순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바다와 산이 평화롭게 어우러지는 산길에서 시인은 아무런 감정의 동요나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그곳은 정신적 안식처이기도 하고 일상의 번잡함에서 벗어난 도피처이기도 하다. 순수한 아름다움의 세계이기는 하지만 삶의 일상적 체취가 배어있는 곳은 아니다.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만족은 다양한 것이다. 이 시에서 보이는 아름다움은 자연에서 배울 수 있는 여러 가지 덕목 중에서 다만 일부분에 불과할 것이다. `산길'은 풍부한 삶의 의미가 배제된 길이며 그 산길이 이어주는 바다와 산의 공간은 적극적인 움직임이 억제된 채로 얻어진 고요하고 정적인 동양적인 침묵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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