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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비 / 김수영

by 언덕에서 2009. 9. 14.

 

 

 



                                                                                                                 김수영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 

 

명령하고 결의하고

'평범하게 되려는 일' 가운데에

해초처럼 움직이는

바람에 나부껴서 밤을 모르고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투명한 움직임의 비애를 알고 있느냐

여보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 

 

순간이 순간을 죽이는 것이 현대

현대가 현대를 죽이는 '종교'

현대의 종교는 '출발'에서 죽는 영예

그 누구의 시처럼

그러나 여보

비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라

너의 벽에 비치는 너의 머리를 사랑하라 

 

비가 오고 있다

움직이는 비애여 

 

결의하는 비애

변혁하는 비애......

현대의 자살

그러나 오늘은 비가 너 대신 움직이고 있다

무수한 너의 '종교'를 보라 

 

계사 위에 울리는 곡괭이소리

동물의 교향곡

잠을 자면서 머리를 식히는 사색가

--- 모든곳에 너무나 많은 움직임이 있다 

 

여보

비는 움직임을 제(制)하는 결의

움직이는 휴식 

 

여보

그래도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느냐

그래서 비가 오고 있는데!

 

 

 

 

 

- 시집 <달나라의 장난> (춘조사 1959)

 

 

 

 

 

 

 

 

 

 

 

 


 

 

각박한 세상에 시 한 편 마음속에 담고 다니는 낭만이 아쉬운 시대이다. <벼락 치듯 나를 전율시킨 최고의 시구>이란 책이 있다. 대체 시인들은 어떤 시에 탄복하고 경이로움을 느꼈을까.

 장석주 시인은 '마음에 화살처럼 꽂힌 시구'로 김수영의 '비'를 꼽았다. "놀라워라, 움직이는 비애라니! 비와 비애의 음가가 겹쳐지며 한 순간에 눈이 번쩍 뜨인다."라고 읊었다. 김남조 시인 역시 40여 년 전 <그대들 눈부신 설목 같이> (삼중당 1986) 라는 수필집에서 비를 표현한 가장 아름다운 표현으로 아래 부분을 들었다.

 

 '비가 오고 있다 / 여보 / 움직이는 비애(悲哀)를 알고 있느냐'

 

 김수영 시인(1921 ∼1968)은 신동엽과 더불어 1960년대 한국문학의 르네상스를 이끌며 우리 시를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시인이다. 그의 작품은 이지적이며 때로 난해한 현대시가 주를 이루지만 위의 '비'는 20대의 젊은 연인들이 비 오는 날 조용한 찻집에서 잃어줘도 좋을 것 같은 이지적인 시다. 김수영은 초기에는 모더니스트로서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했으나, 4ㆍ19혁명을 기점으로 현실비판의식과 저항정신을 바탕으로 한 참여시를 썼다. 그는 1945년 [예술부락]에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한 뒤 마지막 시 <풀>에 이르기까지 200여 편의 시와 시론을 발표하였다. 김수영이 가진 작품의 시사적(詩史的) 맥락에 대해 평론가 김현은 “1930년대 이후 서정주ㆍ박목월 등에서 볼 수 있었던 재래적 서정의 틀과 김춘수 등에서 보이던 내면의식 추구의 경향에서 벗어나 시의 난삽성을 깊이 있게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던 공로자”라고 말하였다.

 김수영은 <풀>을 짓고 난 뒤 15일 만에 밤늦게까지 통음하면서 시대의 울분을 토로하다 귀가 도중 취한 채로 집 앞에서 좌석버스에 치여 즉사했다.

 그는 죽고 난 뒤 점점 더 새로운 빛을 발하면서 신화처럼 우리 사회에 머물고 있다. 전형적인 난해시에서 거침없는 참여시까지, 개인적 서정을 노래한 시에서 혁명을 노래한 시까지 그의 시는 참으로 커다란 진폭을 가졌다. 그 때문에 지난 20년 동안 모더니즘 시 그룹에서는 꿈과 자유를 노래한 그를 ‘시적 스승‘으로 모시고 민족시 쪽에서는 자유와 혁명을 노래한 그를 ’정신적 선배‘로 섬겼다.

 도대체 무엇이 김수영을 우리 시사에 그처럼 장대하게 일으켜 세웠는가. 어떤 이는 그것이 ‘뭔지 모를 것 같은 난해한 시들 속에 노다지로 숨어 있는 기발한 이미지의 결정’이라고 했고, 또 어떤 이는  ‘당대 모더니즘시와 참여시를 모두 수용했으면서도 오늘날에도 폭넓게 공감을 자아내게 만드는 그의 선진적인 시대정신’이라고 했다. 백낙청은 1970년대 이후 활발한 활동을 보인 시인 신경림, 고은, 조태일, 그리고 김지하까지도 김수영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여러 문학평론가들과 후대 시인들이 한결같이 지적한 김수영 시의 미덕은 어느 문학평론가가 표현한 아래의 구절이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난해해 알 듯 모를 듯 하면서도 기가 펄펄 살아있다. 강렬하고 역동적이며 양심적이고 솔직하다. 해방과 혁명의 이미지를 담고 있고 온몸으로 몸부림치며 썼다. 그 절실함은 당대는 물론 후대 시인 그 누구도 따르기 어렵다.”

 전진하는 행동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제약에 부딪치고 만다. 이럴 때 인간은 사회의 허위와 모순과 압박을 극명하게 인식하며 자유를 절규하게 된다. 자신의 삶은 자유를 향한 싸움이라고 김수영은 믿었다. 안주와 정체에 만족하며 자유를 위해 비상(飛翔)하여 본 일이 없는 사람은 자유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전진에 전진을 거듭하려는 그의 삶은 자유를 향한 영원한 여정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자유를 얻기 위해 현실과 치열하게 맞서는 이런 태도로 인해 그를 참여파라고 분류하는 것이다.

 가난한 시인이었던 그는 생활 현실에서도 적잖은 구속을 받았다. 따라서 그의 시에는 삶, 생활, 육체, 현실, 돈, 여자, 가족 따위와 같은 지극히 현실적인 대상들이 자주 등장한다. 위의 시 '비'에서도 그러한 모습이 여과 없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생활 현실을 수긍하고 그 범속의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전진하는 자의 삶이 세속적 제약으로 인해 고통스러워질 때에도 그는 자기 혁파(革罷)를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위의 시 '비'는 기나긴 장마철, 끊임없이 내리는 비를 보며 인간 본연의 실존으로 돌아가 욕심 없이 자신을 탐구하여 시심(詩心)을 굴려 빚은 대작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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