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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님의 침묵(沈默) / 한용운

by 언덕에서 2009. 9. 9.

 

 

 

 

님의 침묵(沈默)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 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에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 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시집 <님의 침묵>  (회동서관 1926) 

 

 

 

 

 

 

 

 


 만약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을 모르는 외국의 문학 독자가 아무 선입견 없이 <님의 침묵>을 읽는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틀림없이 아름다운 연시(戀詩)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도 남성이 아니라 님을 향한 한 여인의 절절한 사랑을 노래한 서정시를 연상하게 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만해가 불교의 승려이며 기미독립운동을 일으킨 애국지사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한국 사람들은 <님의 침묵>을 사랑의 시로서 읽으려 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연애시 같으면서도 속은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노래했던 사군가(思君歌)의 전통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 결과로 님은 님이 아니라 조국을 가리킨 것이며, 침묵은 이별이 아니라 그 조국을 잃은 식민지 상황을 의미한 것이라는 모범답안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아 님은 갔습니다’로 시작하는 <님의 침묵>은 기미 독립운동의 좌절을 노래한 삼일절 노래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가 하면 또 만해의 님은 님이 아니라 니르바나의 마음을 현상화한 부처님이며, 그 침묵은 깨달음을 향한 끝없는 구도(求道)의 길을 의미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시를 증도가(證道歌)의 하나로 바꿔버린다. 만해의 님은 수많은 비평서 속에서 이렇게 속(俗)과 성(聖)의 양극을 오가는 시계추가 된다.

 그러나 정말 <님의 침묵>은 기미독립선언문이나 혹은 불교 유신론의 연장선상에서 읽혀야 하는 것인지. 그에 대해서 만해 자신이 직접 대답하고 있는 것이 바로 시집 <님의 침묵>의 첫머리에 실린 ‘군말’이라는 서시(序詩)이다. 만해는 그 글에서 자기가 시의 키워드로 삼은 '님'이란 말에 대하여 분명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것인 바로 ‘님만 님이 아니라 기리운 것은 다 님이다’라는 구절이다. 무엇보다도 이 시구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은 ‘...만 아니라’의 그 조사용법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님을 조국 또는 부처님으로 풀이해온 사람들은 ‘님만 님이 아니라...’를 ‘만’자를 빼고 그냥 ‘님은 님이 아니라’로 읽어온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님의 침묵>은 연시적(戀詩的) 요소가 전연 배제된 애국시 또는 종교시의 이데올로기로서만 남게 된다. 하지만 만해는 분명히 ‘군말’에서 ‘님은 님이 아니라’라고 하지 않고 ‘님만 님이 아니라’라고 읊고 있다. 그가 말하는 '님' 속에는 일상적인 님(戀人)의 뜻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한용운의 시는 불교적인 비유와 고도의 상징적 수법으로 이루어진 서정시인데, 그 사상적 깊이와 예술적 차원의 높이로 그는 한국 현대시 사상 가장 빛나는 시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우리 나라 근대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한 사람 들라고 하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만해 한용운을 꼽을 것이다. 어째서 그가 위대한가. 그는 다방면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독립운동가이고, 시인이었으며, 또한 승려였으며, 혁명가였다. 그러나 여러 방면에서 남긴 숱한 업적만으로는 그의 위대함을 설명할 수 없다. 그가 민족의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된 진정한 까닭은 시인 조지훈이 지적했듯이 ‘혁명가와 선승(禪僧)과 시인이 일체화’되었던 그의 생애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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