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詩)를 읽다

낙화(落花) / 조지훈

by 언덕에서 2009. 8. 20.

 

 

 

낙화(落花)

 

                                                         조지훈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 <상아탑 5호> (1946. 4)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지는 꽃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서글픔을 차분하게 노래한 한 폭의 잘 그린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이 시는 조지훈 시인(1920 ∼ 1968)의 대표작품이다. 화자의 쓸쓸한 삶의 우수가 적막한 분위기, 전통적 율조를 바탕으로 절제된 언어 속에 압축되어 있다. 또한, 시의 진술이 비유 없이 묘사적 심상에 의지하고 있어 읽을수록 시의 이미지 속으로 몰입되게 만든다.

 이 작품에서는 속세를 멀리한 은자(隱者)의 체념과 선비의 정신적 지조와 자부가 동시에 드러난다. 옛 시조에서 흔히 보이는 주제 의식과 맞닿아 있으며 선비로서의 기품과 달관의 고양된 정신세계가 정적이면서 신비감을 주는 아침녘 뜰의 분위기와 조화되어 선적(禪的)이고 고요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더욱이 '지기로소니, 탓하랴, 저어하노니' 등의 우리말의 고풍스런 시어들은 은자의 이미지와 어울리면서 높은 품격을 더하고 있다. 세 마디와 네 마디 가락을 섞어 쓰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연시조 형태에 가깝게 느껴진다.

 시상의 전개를 살펴보면, '뜰→ 방안→ 마음'으로 이어지는 공간 이동의 추이에 따라 '낙화→ 낙화의 아름다움→ 은자의 고운 마음'으로 이어지며, 화자의 심정을 낙화의 이미지로 그리면서도 고상하고 아취(雅趣) 있는 선비의 기품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 연, '꽃이 지는 아침은 / 울고 싶어라'에서는 정적이며 신비감을 주는 이미지에서 화자의 감정이 이입되어 시심의 극치를 만들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사라질 때에는 아쉽고, 쓸쓸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러한 사람의 일상적 감정이 시인에게는 늘 주요한 시적 주제가 되어 평범한 소재도 다채로운 목소리로 노래하게 된다.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꽃의 떨어짐을 보면서 격정적인 슬픔을 노래한다면, 이 시는 그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삶에의 달관적인 입장을 취한다. 이 작품에서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새벽이 가까운 밤의 적막한 분위기에 어울리게 나지막이 들려온다.

 한국의 전통 의식과 민족의식을 서정적 대상을 삼는 조지훈 시인의 초기의 시적 성과는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펴낸 <청록집>에 집약되어 있다. 해방 공간에서 조지훈은 순수한 시 정신을 지키는 사람만이 시인으로 설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개성의 자유를 옹호하고 인간성의 해방을 추구하는 것이 시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이 시는 절제된 언어, 정형시에 가까울 정도로 정돈된 시행이 전체적인 시적 균형을 이루는 단아(端雅)하기 짝이 없는 작품이다.

 

'시(詩)를 읽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데킬라 / 문혜진  (0) 2009.08.22
북에서 온 어머님 편지 / 김규동  (0) 2009.08.21
연보(年譜) / 이육사  (0) 2009.08.18
병상록(病床錄) / 김관식  (0) 2009.08.17
백마고지(白馬高地) / 김운기  (0) 2009.0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