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킬라
문혜진
데킬라 생각나게 하는 비다
멕시코 남자 싸한 콧김이
플라타너스 잎새에 닿았다가
내 빨간 어깨로 뿜어지는 저녁
술잔을 탁자에 탁 내리치고
반달로 자른 레몬에
설탕, 커피를 꾹꾹 눌러
한입에 빨아들인다
침이 확 고이고
코끝이 시큰거려
신맛
단맛
쓴맛이
왈칵
죽은 애인의 주소처럼 밀려온다
인생은 참 화냥년 같아*
그치?
* 니코스 카잔차스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가 한 말이다.
- 시집 <질 나쁜 연애> (민음사 2004)
멕시코 특산의 다육식물인 용설란(龍舌蘭)의 수액을 채취해 두면, 자연히 하얗고 걸쭉하게 되어 풀케라는 탁주가 된다. 이것을 증류한 것이 테킬라이다. 멕시코 원주민들이 오래전부터 용설란을 삶아서 갈아 즙을 낸 후 발효해 마시던 술이 있었는데 그게 널리 멕시코인들에게 사랑받는-우리의 맥주처럼 애용한다는- 풀케(Publique)다. 풀케는 우리의 막걸리 같은 양조주다. 이후 스페인으로부터 증류기술이 전파되고 이 풀케를 증류해서 맑게 만든 것이 메스칼(Mescal)이다. 이 메스칼은 멕시코의 여러 곳에서 생산 되지만 그중 Agave Azul Tequilana를 원료로, 데킬라 지방에서 생산해 내는 술을 정부가 특별 관리해서 데킬라란 술이 만들어진다. 주정도 40도 정도의 무색투명한 술인데 마실 때는 손등에 소금을 올려놓고 그것을 핥으면서 쭉 들이켜는 것이 본식(本式)이다. 원래 테킬라는 한 지방의 토속주로서 그다지 고급술은 아니었으나 1960년을 전후로 세계적으로 유행한 '테킬라'라는 재즈에 의해 선풍적으로 유명해졌으며, 특히 멕시코 올림픽을 계기로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문혜진 시인(1976 ~ )은 현대인, 그 중에서도 ‘도시 아이들’의 놀이 현장을 발랄하고 경쾌한 감각과 과감하고 거침없는 몸짓으로 장난기 가득하게 그려낸다. 그래서 그의 시는 언뜻 만화, 영화, 대중음악 등 도시적 요소와 약물에 취한 뒷골목 아이들의 반항과 일탈의 기록인 듯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각 시편들을 찬찬히 읽어보면 잃어버린 순수성과 상처 입은 영혼에 대한 연민, 그리고 기계적이고 비인간화된 도시문명을 원초적 생의 에너지로 극복하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를 발견하게 된다. 시인은 화려하고 선정적인 것들로 가득한 도시에 신선하고 생생한 야성을 되살려 냄으로써, 순정하지 못한 지적 포즈보다는 차라리 ‘질 나쁜 연애’가 더 생에 충실한 것일 수 있음을 대단히 명쾌하게 보여준다.
"외설스러울 정도로 대담한 성적 표현들, 억압적인 제도에 반기를 드는 불온한 진술들, 문혜진의 시는 미지근하거나 밋밋하지 않다"면서 "우리가 감추려고 하는 본능을 거침없이 표출한다."고 최승호 시인은 평가했다. 그것은 도시 문명의 특성과 관계된다. 도시는 콘크리트와 유리질의 견고한 성채인 동시에 흡입과 발산이 빠른 대단히 탄력적인 구조다. 그곳에선 진지함은 우스꽝스럽고 ‘촌스러운’ 것이 되며, 무거운 것을 무거운 것으로 이겨내려는 것은 어리석고 구태의연한 발상일 뿐이라는 것이 시인의 인식인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도시에선 심각해지기보단 그저 질 나쁜 연애나 하고 말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시인의 몽상일 분이며, 단언컨대 현실에서는 결코 그렇게 쉽게 연애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연애는 질이 나쁘거나 좋을 수 없는, 언제나 절실하기 때문에 상처 입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적나라해진 화자는 거의 아이와도 같은 눈빛으로 글을 전개한다. 그리고 그 천진한 시선에 비친 도시의 환영과 허상을 거침없이 발설함으로써 독자들은 숨길 수 없는 치부를 들킨 것처럼 뜨끔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과감하게 ‘말해’ 버려도 여전히 남는 질문은 있다. 과연 여기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 도시에서 떠나고 싶은, 그러나 떠나지지 않는, 혹은 떠날 수 없는 무수한 ‘나’들은 떠나지 않고, 다만 살아갈 뿐이다. 이 비극을 비장한 것으로 몰아가지 않고 희화화함으로써 단숨에 그 무게를 털어낸다. 이렇게 우리들은 도시 속에서 살아나가는 전략을 마련하는 것이다.
아참, 위의 문혜진의 시와는 별 관계가 없을 수도 있지만 그리스인 조르바에 대해서도 생각나는 것이 있다. 지금도 백발의 노인 조르바가 말하고자 했던 '자유'가 무엇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다만 살아갈 뿐이다'가 답이 아닐는지? 카잔차스키의 묘비명인 '아무 것도 원치 않는다,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에서 말하는 그것(자유)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아무 것도 원치 않는 자유,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는 과연 존재하긴 하는 걸까, 하는 점을 의심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다만 살아갈 뿐인데…….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란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 ‘그리스인 조르바’(니코스카잔차스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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