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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절대 고독(絶對 孤獨) / 김현승

by 언덕에서 2009. 7. 31.

 

 

 

 

 

 

 

 

 

 

 

 

절대 고독(絶對 孤獨)

 

                                           김현승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눈을 비비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영원의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내게로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스한 체온을 새로이 느낀다.

 

그 체온으로 내게서 끝나는 영원의 먼 끝을

나는 혼자서 내 가슴에 품어 준다.

나는 내 눈으로 이제는 그것들을 바라본다.

 

그 끝에서 나의 언어들을 바람에 날려보내며,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 보낸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무한의 눈물겨운 끝을

내 주름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도 없는 그 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 ― 나의 시와 함께.

 



 

 -시집 <절대고독> (성문각 1970)

 





김현승 시인(1913 ~ 1975)의 제4시집 <절대 고독>의 표제가 된 작품이다. 그의 시는 후기로 접어들면서 ‘고독’의 추구에 집중되었다. 시집 <견고한 고독>(1968), <절대 고독>(1970) 등은 이러한 시인의 경향을 대표한다.

 '고독'은 인간에게만 있는 인간의 특권이다. 이 시에서 나타난 ‘고독’은 절망적인 고독이 아니다. ‘이를테면 부모 있는 고아와 같은 고독’이라고 지은이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으며, ‘고독을 표현하는 것은 나에게는 가장 즐거운 시예술의 활동이며, 윤리적 차원에서 참되고 굳세고자 함이다’라고 스스로 그의 시집 <절대 고독>의 자서(自書)에서 수차례 설명했다. 시인이 예로 부모를 든 것은 기독교를 의식한 것 같다.

 모두가 다 아는 바와 같이 김현승 시인은 서구적이며 기독교적인 시인이다. 그런데 신앙의 둥지 속에서 그리스도의 박애를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기독교인이 고독을 추구한다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시인은 신앙과는 별개로 노경(老境)의 경지에서 인생을 재발견하려는 집요한 추구가 '고독'에게 귀결되는 자유롭고 허허로운 경지를 찾은 것으로 보인다.

 흔히 고독이 고립 의식이나 적료감(寂廖感)을 나타내기 때문에 인생을 소극적, 부정적인 경향으로 보기 쉽다. 쉽게 이야기해서 외로운 사람이 신경질적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고독은 인간에게만 있는 문제이므로 오히려 인간의 조건, 인간의 특권으로 보고 있는 것이 현대의 문학적ㆍ철학적인 해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즉 고독은 자기 자신, 실존(實存), 단독자(單獨者)로서의 인간의 한 표지(標識)이며, 모든 진리는 단독자에 의해서만 전해지고 받아들여진다고 키에르케고르가 설명한 부분과 맥이 닿는다.

 신의 무한성, 영원성은 실존하지 않으며 인간은 그 근원에서부터 고독하다는 시인의 자각은 <견고한 고독>, <절대 고독>이라는 시집으로 결실을 맺는다. 여기서의 '고독'이란 '외로움'과 다르다. 그것은 단독자로서의 인간적 실존에 대한 자각을 의미하는 철학적인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짐승과는 달리 인간은 자신이 고독한 존재라는 것을 앎으로써 세계와 자신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독의 세계에서 비로소 인간은 절대자(또는 신)와 대면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되고, 자신을 새로 발견하는 탄생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 시인의 일관된 인식이다.

 김현승은 지성적인 시인이다. 1930년대의 그의 초기 시도 이상(李箱)이나 편석촌 등의 당시 수준에서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를 ‘1950년대에 와서야 발견된 1930년대의 우리 시단(詩壇)의 모더니스트’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절대 고독>은 모더니스트가 전에 없이 깊은 시적 사유(思惟)에 도달한 철학시, 추상시(抽象詩)라고 할 것이며 우리나라 현대시의 격을 몇 단계나 높인 수작이라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