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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다

설야(雪夜) / 김광균

by 언덕에서 2009. 7. 27.

 

 

 

설야(雪夜)

 

                                                           김광균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야위어가며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女人)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1938. 1. 8)

 

 

 

 

 


 

 

 

더위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이런 염천에 눈 오는 밤에 관한 시를 생각해 보았다. <설야>는 눈이 내리는 이미지가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회한과 추억으로 다양하게 구사되어 지난날의 사진과 그리움이 한데 어울러져 있는 아름답고 고운 시이다. 서글프고 서러운 밤에 내리는 눈, 그 눈이 도회인의 건조한 감정에 잔잔히 물결치면서 부드러운 서정을 나타내고 있다. 서경적인 이미지와 절제된 감정이입이 조화된 그야말로 보기 드문 감각적 주지시인 것이다.

 이 시는 눈 오는 날 밤의 정경을 통해 지향 없는 그리운 감정과 상실감에서 오는 서글픔을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표출하고 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눈 오는 고요한 밤의 조용한 정경 속에서 피어나는 추억과 환상을 그린 시이다. 시인은 센티멘털리즘을 청산하는 데 필사의 노력을 바쳐왔다. 센티멘털리즘은 예술을 부정하는 한 개의 허무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의 시구(詩句)는 주지시가 무색할 만큼 솔직한 감상이 노출되어 있다.

 김광균 시인(1914 ∼1993)의 작품 거의 전부는 <추일 서정>과 마찬가지로 주지적인 특징을 가지고 이미지 수법을 구사하는 데 있다. 그러나 이 시 <설야> 한 편만은 주지적 경향과는 아주 다른 부드러운 서정의 시이다. 이 시 가운데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 눈이 내려’, ‘호올로 차디찬 의상을 하고’ 등과 같은 이미지 수법이 눈에 안 띄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이 시는 감정을 흔들고 호소하는 서정풍의 작품이다.

 우리 모두가 존경해 마지않는 김현승 시인은 이 시에서 가장 뛰어난 곳은 단 1행으로 된 제4연의 표현이라고 했다. 약간의 성적 매력이 보태진 것을 관능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순수하고 차원이 높은 폴 발레리의 시에도 가끔 이러한 요소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이 저속에 떨어지지 않고 품위를 유지하면, 시로서는 오히려 효과를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제4연의 표현은 관능적이면서도 품위를 유지하여, 이 시를 전체적으로 완성된 구조를 느끼게 만들고 있다.

 작가는 뜰에 내려 눈을 맞으면서 이미 싸늘한 옛 추억에 다시 가슴을 앓고, 그것은 하나의 슬픔으로 승화되어 눈 위에 곱게 서리는 것을 본다. 눈은 빛도 향기도 없고 싸늘하지만, 그 눈발 하나하나는 옛 추억들의 조각이고, 내려서 쌓이는 소리는 옛날 사랑했던 한 여인의 옷 벗는 소리를 연상케도 하는 것이다. 밤에 내리는 눈과 옛 추억을 연결하여 사랑의 허무, 인생의 애상을 노래한 그림 같은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