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빙(結氷)의 아버지
이수익
어머님,
제 예닐곱 살 적 겨울은
목조 적산가옥 이층 다다미방의
벌거숭이 유리창 깨질 듯 울어대던 외풍 탓으로
한없이 추웠지요, 밤마다 나는 벌벌 떨면서
아버지 가랑이 사이로 시린 발을 밀어 넣고
그 가슴팍에 벌레처럼 파고들어 얼굴을 묻은 채
겨우 잠이 들곤 했지요.
요즈음도 추운 밤이면
곁에서 잠든 아이들 이불깃을 덮어 주며
늘 그런 추억으로 마음이 아프고,
나를 품어 주던 그 가슴이 이제는 한 줌 뼛가루로 삭아
붉은 흙에 자취 없이 뒤섞여 있음을 생각하면
옛날처럼 나는 다시 아버지 곁에 눕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머님,
오늘은 영하의 한강교를 지나면서 문득
나를 품에 안고 추위를 막아 주던
예닐곱 살 적 그 겨울밤의 아버지가
이승의 물로 화신해 있음을 보았습니다.
품 안에 부드럽고 여린 물살은 무사히 흘러
바다로 가라고,
꽝 꽝 얼어붙은 잔등으로 혹한을 막으며
하얗게 얼음으로 엎드려 있던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 시집 <야간열차> (예문관 1978)
영하의 추운 겨울날 한강 다리를 건너면서, 가난했던 유년시절 밤 추위를 온몸으로 막아주시던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억해내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 시에는 아버지의 사랑을 떠올리는 화자의 차분하면서도 애틋한 목소리가 담겨져 있어 읽는 순간마다 눈물이 난다. 동일한 감각적 이미지(추위-유년의 고통과 시련, 차가운 얼음-아버지의 따뜻한 사랑)를 대조적으로 활용하여 대상의 의미를 슬프고도 아름답게 강조하고 있다.
이수익 시인(1942~ )의 시에서는 구조적인 완결미와 우수 어린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방법적인 면에서는 이미지즘의 영향을, 내용적인 면에서는 심미주의적 경향을 나타내는 시들을 주로 썼는데, 그의 시에서 두드러진 것은 이미지의 선명성과 아름다움이다. 이수익 시인의 유년은 적산가옥 마을이었다. 재개발 탓에 많이 정리되었지만 지금도 우리나라의 구석구석에는 일제시대의 적산가옥이 많이 남아 있어서 이 시의 애잔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의 시세계가 지닌 특징은 대상과 인식을 같은 차원에 두고 상호 교감의 일치점이 되도록 선명한 이미지로 처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념이나 철학성에 대한 관심을 두기보다는 인간적인 우수(憂愁)와 비감(悲感)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를 읽으면 문득 아버지의 개념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을 해보게 된다. 몇 년 전 모신문사에서 초등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실시한 '아버지는 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설문서에서 대부분의 아이들이 '돈 벌어오는 사람', '밤늦게 집에 오는 사람', '술 마시고 오는 사람' 으로 표현한 것을 보았다. 그런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몰라도 우리나라 고대 문집부터 살펴보더라도 사모곡은 있어도 사부곡은 없다. 참으로 불쌍한 존재인 것이 아버지가 아닌가.
위의 시를 읽으면서 이제 우리에게도 내세울 만한 사부곡 하나를 가졌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가난하던 그 시절을 생각하노라면 어머니라는 단어는 가슴을 아리게 만들지만, 아버지라는 단어는 '쓸쓸함'이라는 단어 하나로 정리하고 싶다. 시인은 '꽝 꽝 얼어붙은 잔등으로 혹한을 막으며 /하얗게 얼음으로 엎드려 있던' 모습으로 아버지를 참으로 쓸쓸하게 형상화내고 있다.
가장 큰 차가움으로 가장 큰 따뜻함을 만들어내셨던 아버지…….
오늘 당신이 유난히 그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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