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花樣年華)*
이병률 (1967 ~ )
줄자와 연필이 놓여 있는 거리
그 거리에 바람이 오면 경계가 서고
묵직한 잡지 귀퉁이와 주전자 뚜껑 사이
그 사이에 먼지가 앉으면 소식이 되는데
뭐 하러 집기를 다 들어내고 마음을 닫는가
전파사와 미장원을 나누는 붉은 벽
그 새로 담쟁이 넝쿨이 오르면 알몸의 고양이가 울고
디스켓과 리모컨의 한 자 안되는
그 길에 선을 그으면 아이들이 뛰어노는데
뭣 때문에 빛도 들어오지 않는 마음에다
돌을 져 나르는가
빈집과 새로 이사한 집 가운데 난 길
그 길목에 눈을 뿌리면 발자국이 사라지고
전봇대와 옥탑방 나란히 키를 따라
비행기가 날면 새들이 내려와 둥지를 돌보건만
무엇 하러 일 나갔다 일찌감치 되돌아와
어둔 방 불도 켜지 않고
퉁퉁 눈이 붓도록 울어쌌는가
*영화감독 왕가위의 영화제목.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한다>(문학동네, 2005)-
花 = 꽃 화, 樣 = 모양 양, 年 = 해 연, 華 = 빛날 화.
화양연화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왕가위 감독의 영화로도 유명하지요.
중국어 사전을 찾아보니 "화양(花樣)"은 "양식, 명, 의식, 수단, 궤계"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화양연화(花樣年華)"라고 할때는 "如花朶(꽃송이 같은, 꽃다운)"의 의미를 갖는다고 나오는군요. "연화(年華)"는 '시기, 때, 봄빛(春光)'의 의미를 갖는데, 우리말의 "이팔청춘"을 중국어에서는 "이팔년화"라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보면 '화양연화(花樣年華)'는 '여자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 즉 '꽃다운 청춘시절'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군요. 순수한 한자성어는 아니고 중국구어가 반영된 어휘로 보여집니다.
위의 시에서는 다양한 간격이 제시됩니다. 하지만 '틈' 보다 간격의 완화의지를 보여주는 작품이군요. 줄자와 연필 사이, 전파사와 미장원 사이, 디스켓과 리모컨 사이, 빈집과 새로 이사한 집 사이 등……. 시인은 이러한 관계들 사이에서 마음을 닫는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갖은 사이를 메우는 먼지(1연), 담쟁이 넝쿨(2연), 아이들(2연)은 관계의 틈을 완화시키고 연결하려는 시인의 가슴 아픈 기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인연에 대해 생각하다가
인연과 세월을 떠돌다가
인연과 세월과 풍경을 바라보는 시간까지 왔다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여전히 만져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스침이 많아 상처가 된 내력들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어찌 시뿐이겠는가“
시인의 시를 읽으니 위의 글은 영화의 스토리와는 상관없이 시인 개인의 기억과 인연의 퍼즐을 함축하고 있네요. 시인은 인연을 생각하다가 인연과 세월을 떠돌다가 인연과 세월과 풍경을 바라보는 시간까지 왔다고 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여전히 만져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스침으로 상처가 된 내력들을 다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어찌 시와 영화 뿐이고, 차우와 리첸과 시인만의 일이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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