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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하마스(HAMAS) '의 뜻과 유래

by 언덕에서 2008. 12. 29.

 

 

'하마스(HAMAS) '의 뜻과 유래

 

 

 

하마스(HAMAS)는 아랍어 'Harakat al-Muqaqama al-Islamiyya'(이슬람 저항운동)의 약칭이다. 1970년대 후반에 문화운동으로서 시작되었는데, 1987년 이후부터는 팔레스타인 해방을 주장하며 무장 게릴라 활동을 개시했다. 지도자는 1989년 이스라엘 군당국에 체포되었다가 1997년에 석방된 이슬람 법학자인 아흐메드 야신이다.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와 대립하며 중동평화교섭에 반대하고 있다.   1993년 이스라엘과 PLO가 오슬로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양측간 긴장이 완화되었을 때 세력이 다소 위축되었으나, 2001년 2월 이스라엘 총리로 강경파 샤론이 취임하면서 양측간 무력 충돌이 격화되자 가자 지구를 중심으로 강력한 지지를 얻게 되었다. 샤론은 PLO를 인정하지 않고 유대인 정착지를 확대하는 등 팔레스타인에 대한 강경책을 썼는데 여기에 PLO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하마스의 무력 투쟁론은 더욱 지지를 받게 되었다. 하마스는 2001년 이후 이스라엘 내에서 한동안 중단했던 자살폭탄 테러를 재개했다.

 

 

 팔레스타인 점령지를 중심으로 반(反)이스라엘 투쟁을 전개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조직 저항운동 단체 겸 정당. 아랍어 'Harakat al-Muqaqama al-Islamiyya'(이슬람 저항운동)의 약칭 ‘하마스’는 ‘용기’라는 뜻이다. 1970년대 후반에 문화운동으로서 시작되었는데, 팔레스타인의 대 이스라엘 무장 봉기인 '제1차 인티파타'가 일어난 1987년 아흐메디 야신 등이 결성했다. 초기에는 요르단 강 서안과 가자 지구를 계속 통치하려는 이스라엘을 완전히 몰아내고 팔레스타인 전역에 이슬람 국가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했다.

 1987년 이후부터는 팔레스타인 해방을 주장하며 무장 게릴라 활동을 개시했다.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와 대립하며 중동평화교섭에 반대하고 있다. 1993년 이스라엘과 PLO가 오슬로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양측간 긴장이 완화되었을 때 세력이 다소 위축되었으나, 2001년 2월 이스라엘 총리로 강경파 샤론이 취임하면서 양측간 무력 충돌이 격화되자 가자 지구를 중심으로 강력한 지지를 얻게 되었다. 샤론은 PLO를 인정하지 않고 유대인 정착지를 확대하는 등 팔레스타인에 대한 강경책을 썼는데 여기에 PLO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하마스의 무력 투쟁론은 더욱 지지를 받게 되었다. 하마스는 2001년 이후 이스라엘 내에서 한동안 중단했던 자살폭탄 테러를 재개했다.

 이러한 투쟁 방향은 2006년 2월에 있었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총선거에서 유권자의 지지를 받아 큰 압승을 하도록 하였다. 이스라엘군의 거주 이전 자유 등으로 억압받던 팔레스타인 민중의 불만이 이스라엘에 반대하는 하마스에 대한 지지로 표현되었다.

 

 


하마스는 어떤 조직인가 - [연합뉴스](2008. 12. 28)

 

 이스라엘이 27일 팔레스타인 거주지역인 가자지구를 기습 공격한 가운데 타격 대상이 된 [하마스]에 세계적인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하마스는 보복 공격을 다짐하고 나섰고 이스라엘은 지상군 공격 의지까지 비치고 있어 확전 우려가 커지고 있다.

 팔레스타인의 강경 무장 정파(政派)인 [하마스]는 이슬람저항운동(Islamic Resistance Movement)을 뜻하는 아랍어 단어 첫 글자를 차례로 적은 것이며, 아랍어로 '열정'이라는 뜻이다. 1987년에 아흐마드 야신이 조직했으며 그 이전에 이집트의 모슬렘 형제단(Muslim Brothers)의 팔레스타인 지부가 모체다.

 하마스는 1987년 팔레스타인 무장봉기를 의미하는 인티파다 발생을 계기로 팔레스타인 온건파인 파타의 경쟁 정파로서 팔레스타인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하마스는 이슬람 저항 운동이라는 명칭에서 보여지듯 단순한 정치활동 조직이 아닌 이슬람 원리주의에 기반해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를 추구하는 양면성을 가진 조직이다.

 활동은 팔레스타인 주민에게 교육과 의료, 경제적 구제 등의 사회활동을 의미하는 다와 (Da'wa)와 이스라엘에 대한 저항을 의미하는 지하드(Jihad)로 나뉜다. 특히 빈곤층 대상 의료 및 구제사업은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주민의 지지를 얻는 동력이다. 하마스는 가자지구는 물론 요르단강 서안지구, 나아가 현재의 이스라엘 영토도 이슬람 유산으로 절대 내줄 수 없는 성지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하마스는 전 세계의 모슬렘에게 이스라엘이 점령한 팔레스타인 영토를 되찾기 위한 지하드를 주장하면서 아랍국가들에게 지원을 요청해왔다.

 하마스는 1988년 공표한 강령에서 평화적 수단으로 팔레스타인을 해방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며 유일한 수단이 지하드라고 못박았다. 특히 하마스의 지하드는 단순히 이스라엘 군에 대한 저항이 아닌 이스라엘 민간인에 대한 공격도 배제하지 않아 성격 규정을 두고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캐나다, 영국, 호주, EU(유럽연합), 일본, 미국 등은 하마스를 테러 조직으로 규정했으며 요르단은 하마스 조직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하마스 지도부는 팔레스타인내 지도부와 시리아 등의 아랍국내 외부 지도부로 나뉘며 대체로 외부가 더 강경하다. 하마스의 재정은 2003년 당시 미국 정보당국에 따르면 연간 예산이 5천만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며 대부분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걸프 국가내 개인 기부자와 팔레스타인 자선단체가 낸 기금으로 마련된다.

조지 부시 미 행정부는 2001년에 하마스를 돕고 있다는 이유로 미국내 최대 규모 모슬렘 자선단체인 홀리 랜드 파운데이션(Holyland Foundation)의 자산을 몰수한 바 있다. 이란은 연간 2천만∼3천만 달러 정도를 매년 하마스에 지원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최근 하마스 지도부는 이스라엘이 1967년 이전 국경으로 철수한다면 이스라엘의 국가 존재를 인정하겠다고 수차례 밝혀 관심을 모았다. 하마스는 2006년 팔레스타인 입법의회 선거에서 파타를 누르고 총 132석 가운데 76석을 차지해 마흐무드 압바스 수반은 2007년 하마스와 연립정부를 구성했지만, 이런 동거는 오래가지 않았고 하마스는 같은 해 6월 가자에서 파타를 내쫓고 가자를 차지했다.

 이후 하마스는 이스라엘 남부에 로켓공격을 지속해왔으며 이에 이스라엘은 하마스 지도부 표적 암살이나 간헐적인 가자 군사작전으로 대응해 오다 6개월 전에 휴전에 합의했지만 최근 휴전이 종료됐다가 이스라엘의 기습 공격으로 전면전 위기로 몰리고 있다.


 

 

<팔레스타인 독립투쟁사> - [연합뉴스](2004. 11. 11)

 

 팔레스타인인들과 이스라엘의 반목(反目)과 투쟁의 역사는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양쪽이 대치하고 있는 지역은 구약성서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언급된 가나안이다.

 유대인들은 외세의 침입으로 가나안에서 쫓겨나 2천여 년 동안 유랑생활을 하다가 1800년대말 시오니즘(유대인 조국재건운동)이 번지면서 선조들의 땅인 팔레스타인 복귀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의 이런 움직임은 팔레스타인을 위임통치하고 있었던 영국의 정책에 의해 촉발됐다. 영국이 1917년11월 `발포어 선언'에서 팔레스타인 지방에 유대국가 건설을 용인하자 세계 곳곳에서 유대인들이 서서히 이주해 들어오면서 팔레스타인인과 이스라엘인들간의 충돌이 빚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1947년 유엔총회가 팔레스타인을 유대국가와 아랍국가로 분할키로 의결함에 따라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간의 분쟁은 본격화됐다. 이듬해 이스라엘은 건국을 선포하고 미국과 소련이 이를 즉각 승인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이집트와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아랍 5개국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1차 중동전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영토의 70%를 점령했고, 팔레스타인인 100만명이 강제 추방되면서 무장단체를 결성해 무장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전쟁으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과 요르단령으로 분할됐다.

 1964년 5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첫 아랍정상회담에서 아랍연맹의 지원으로 창설됐고 같은해 팔레스타인해방군(PLA)이 결성돼 대(對)이스라엘 무장투쟁을 선언했다.

  PLO의 초대 의장은 변호사 출신인 고(故) 아흐마드 슈크리였다. 1967년 파타 지도자 아라파트가 의장으로 취임하면서 PLO는 본격적이고 장기적인 게릴라투쟁을 펴기 시작했다.

 유엔 총회는 1974년11월 팔레스타인의 주권과 민족국가 건설 권리를 인정했다. 이후 1988년11월 알제리에서 열린 팔레스타인민족평의회(PNC)에서 팔레스타인을 독립국가로 선포, 아라파트를 팔레스타인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1987년 이스라엘 점령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이 제1차 반(反)이스라엘 봉기(인티파다)를 일으키면서 유혈사태가 악화됐으나 1993년 이스라엘과 PLO가 오슬로 평화협정에 조인, 지리한 평화협상이 진행됐다. 이듬해인  1994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출범했고 1996년 초 아라파트가 자치정부 초대 수반으로 선출됐다.

 이스라엘 극우파의 득세와 이에 따른 유혈충돌이 이어지는 가운데 아라파트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2000년7월 이른바 `캠프 데이비드' 협상에 나섰지만 이마저도 실패했다.

 그 후 2000년 9월 아리엘 샤론 당시 이스라엘 리쿠드당 당수의 이슬람 성지 방문사건이 돌출해 제2차 인티파다가 일어나면서 평화협상은 피의 파국을 맞고 말았다.

 2003년 미국과 유럽연합(EU), 러시아, 유엔에 의한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 등 중동평화 로드맵 구상이 마련됐지만 이슬람 과격단체 하마스의 예루살렘 버스테러로 논의 자체가 연기됐고, 올 3월 이스라엘군이 하마스의 창설자 셰이크 아메트 야신을 보복 암살함으로써 로드맵 자체가 물거품이 될 위기에 빠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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