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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업(業.karma)

by 언덕에서 2009. 1. 6.

 

업(業.karma)

 

       정토회 법륜스님

 

 

  

불교의 근본교리 가운데 하나. 몸(身)ㆍ입(口)ㆍ뜻(意)으로 짓는 말과 동작과 생각, 그리고 그 인과를 의미함. 업은 짓는다는 뜻이다. 정신으로 생각하는 작용인 의념(意念)이 뜻을 결정하고 선악을 짓게 하여 업이 생긴다. 의업은 사업(思業)과 사이업(思已業)으로 나누어진다. 사업은 뜻으로 활동하는 정신 내부의 의업이며, 사이업은 한번 뜻을 결정한 뒤 외부에 표현되는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이다. 곧 신ㆍ구ㆍ의 3업(三業)이라 한다.

 또 몸과 입으로 외부로 나타나 표현되는 표업(表業)이 있으며, 그 표업이 끝난 뒤에 밖으로는 표출되지 않아도 선업이나 악업을 상속하는 것을 무표업(無表業)이라고 한다. 그리고 업은 선업·악업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십선업(十善業)ㆍ십악업(十惡業)이 그것이며, 악업만을 단순히 업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업사상이 나타나게 된 데에는 배경이 있다. 인간은 의식을 기본으로 하여 여러 문화를 창조하여 왔다. 복잡다단한 인간역사는 의식의 전개과정이다. 석가모니는 무명(無明)에 사로잡힌 인류중생의 무지몽매를 일깨우기 위하여 업보윤회전생(業報輪廻轉生)의 업사상을 천명하였다. 당시 힌두교의 업이란 오직 유일절대 창조신인 범신(梵神)에 대한 제사행위만을 바람직한 선업으로 보았다. 그리고 육사외도(六師外道)를 비롯한 당시 대부분 사상가·종교가들은 운명적·숙명적 인생관을 가지고 있어서 유물주의·쾌락주의·고행주의가 그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주체적으로 파악되어야 할 업이 타력적ㆍ운명적ㆍ숙명적 사고로 파악되고 있었다.

 이에 석가모니는 업력이 역학적 인과관계에 의하여, 인연화합(因緣和合)의 관계에서, 상의상관(相依相關)의 관계에서, 그 마음의 주체의지에 의하여 그 강약이 나타남을 깨우쳤다. 이를 통하여 허구적인 창조론과 숙명적·운명적 허무주의에서 탈피하고 자유로운 업력의 주체가 되도록 하였다. 특히, 인과응보의 교설과 더불어 업의 본질이나 분류에 관한 고찰이 심화되었고, 행위에 대한 과보(果報)로서의 업은 자연법칙적인 인과만이 아니라 인간사회의 윤리성에 직결된다는 것을 간파하도록 하였다.

 즉, 인간가치판단의 기본적인 것으로서 업보를 나타낸 것이다. 인간은 몸과 말을 통한 두 가지 업이 행하여지고, 그 행위는 사람의 마음속에 무표업으로 남는다. 이와 같이 인간의 행하는 일이 그 사람의 마음을 성숙하게 하고 마음속에 남게 하는 것을 향기가 의복에 풍기게 하는 것에 비유하여 훈습(熏習)이라 칭한다.

 그러나 곧 개업(個業)이 공업으로, 공업이 개업으로 연결되어 사회업(社會業)의 공존공영으로 인한 윤회전생의 순환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사회와 개인이 결코 무관한 관계가 아님을 업을 통하여 인식시키고, 이와 같이 업을 파악하는 것이 깨달음의 첫 걸음이 됨을 강조하였다. 업은 일상생활의 굴레로서 회전하고 있다. 불교는 확실히 개개인의 해탈을 추구하고, 연기설(緣起說)은 유정(有情)의 생존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존, 예컨대 인간과 사회 환경과의 상호의존관계까지도 추구하고 있다.

 업의 본성에 관하여는 <화엄경(華嚴經)> ‘살명난품(菩薩明難品)’ 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생은 4대(四大)로 이루어져 그 안에는 자아의 실체가 없고, 모든 존재의 본성은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과보를 받는 것은 업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그 업이라는 것도 실체는 없다. 마치 맑은 거울에 비친 그림자가 여러 가지이듯이 업의 본성도 그와 같다. 종자와 밭이 서로 모르지만 싹이 트듯이 업의 본성도 그와 같다. 많은 새가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듯이 업의 본성도 그와 같다. 지옥의 고통이 따로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듯이 업의 본성도 그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