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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朋滿座

신경림의 민요집 『민요기행』

by 언덕에서 2007. 9. 28.

 

신경림의 민요집 민요기행

 

 

신경림(申庚林. 1935∼ ) 시인이 1983년부터 1985년에 걸쳐 월간 [마당]지에 연재했던 것을 엮어 펴낸 책으로 1999년 [산하]출판사에서 발행했고, 2005년 [문이당]에서 증보판 발행했다. 글쓴이가 우리의 옛 노래를 찾아 전국을 다니면서 써 놓은 것을 어린이들이 읽기 쉽게 정리한 책이다. 요즘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차지한 것은 방송을 통해 배운 외국 가요나 대중가요가 대부분이다. 대중가요는 줄줄 외우지만 우리의 민요는 거의 모르는 아이들이 많다. 이 책은 어린이들에게 우리의 민요가 어떻게 생겨나고 얼마나 아름다운 노래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민요기행>은 작가 신경림 시인이 제천, 단양, 충주를 중심으로 한 남한강 유역의 중원 지방에서부터 시작하여, 충청, 전라, 강원, 경상, 제주까지 전국을 돌아다니며 직접 보고 들으며 채록한 민요 약 36편을 포함한 기행문이다.

 <민요기행>은 천연덕스럽게 판치고 있는 현대 유행가에 밀려 이제는 듣기 힘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사라지고 잊혀져 가는 우리 조상의 정신문화 유산인 민요를 다시 발굴하고 복원하고자 하는 작가의 간절한 바람과 열정에서 비롯된 작품이다. 이러한 작가의 취지에 맞게 기성 민요집에서 찾아볼 수 없는, 기록으로 보존되지 못한 채 서민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하며 불렀던 민요들에 큰 비중을 두어 구성하였다.

 민요는 오랜 세월에 걸쳐 지겨우리만큼 가난하고 척박하게 살며, 따가운 뙤약볕 아래서 밑도 끝도 없이 힘겹고 지루한 농사일을 해야만 했던 우리네 조상들이 노동의 고통과 힘겨움을 이기기 위해 불렀던 노동요가 그 중심을 이룬다.

   이러저러한 역사의 우여곡절로 인해 만나기 쉽지 않은 민요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성지게 살아 숨 쉬는 각 고장 특유 노래를 <민요기행>을 통해 직접 만나 볼 수 있다.

 

 

신경림( 申庚林.  1935∼ ) 시인

 

 

  ▶민요에 얽힌 사람들의 삶과 정서

 

  저 큰애기 자는 방엔

  숨소리가 둘이 난다.

  홍달 복순 오라버니

  그짓말씀 말으시오.

  동남풍이 건듯부니

  문풍지 떠는 소립니다.

 

  누군가 예쁜 동네 처녀를 보고,

  “저 아가씨 자는 방에서 숨소리가 둘이 나더라. 누군가 밤에 찾아왔던 모양이지?”

라고 약을 올린다. 진짜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예쁜 처녀에게 넌지시 장난을 치는 것이리라. 그러자 처녀는 얼굴이 빨개지며 이렇게 따지겠지.

  “복순 오라버니, 그런 거짓말은 하지 마세요. 바람에 문풍지 떠는 소리랍니다.”

 

  충북 송학면에서 채록했다는 위의 민요를 들으며 우리는 민요에 담긴 옛 사람들의 사랑과 삶을 느낀다. 추잡한 소문일 수도 있는 얘기지만, 그렇게 역겹지 않다. 오히려 운치 있고 건강한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 이 민요는 이 책의 첫 부분 <남한강 유역 담뱃고을의 서정> 가운데 실린 민요의 하나이다.

  이 책은 이처럼 우리네 삶이 담긴 민요를 찾아 이 땅 곳곳을 찾아다닌 기행문이다. 그냥 여행의 기록이 아닌 민요에 얽힌 사람들의 삶과 정서를 중심으로 엮었기에 ‘민요 기행’인 것이다. 모두 15장으로 나뉘어져 남한 지역만큼은 두루 살펴보고 있다. 남한강 유역, 경북 영산 언저리, 경북 북부 지방, 동학이 일어난 전북 일대, 전남 지역, 내포 지방, 충북 내륙 지방, 정선ㆍ동해 연안, 진도에서 보길도에 이르는 지역, 강원도 소양강 주변, 낙동강 유역, 서울 가까운 경기도 지역, 지리산, 제주도 등 팔도에 걸쳐 민요와 사람들의 삶을 취재해 썼다.

   가는 곳마다 민요에 대한 생각은 조금씩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어떤 곳에서는 노동의 힘겨움을 덜어주는 노래를 만나고, 어떤 곳에서는 남녀간의 사랑을 담는 노래를 만난다. 시대적인 분위기를 담고 있는 노래도 있고, 아이들이 부르는 동요도 있다.

 

▶민요를 찾아가는 것은 일의 현장, 삶의 현장을 찾아가는 것

   이 책을 읽다 보면, 우리는 민요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저 ‘예로부터 민중들 사이에 불리던 노래’라고 정의하기엔 민요에 담긴 의미와 사연들이 빛을 바랜다. 글쓴이가 만난 어느 할머니는,

   “살기가 너무 어렵구, 일두 힘들구, 그래 일하면서 노래를 했지만 그게 어디 노래축에나 드나유. 그냥 일이 힘드니까 힘들구 지겨운 걸 잊을라구 노래들을 불렀지요.”

라고 말한다. 민요를 언제 부르냐는 물음에 또 어느 할머니는,

   “언제라꼬 정해져 있는겨. 일할 때도 불르고 심심할 때도 불르고 놀 때도 불르는 게 노래 아닌겨. 일할 때 불르면 일하기 수워로. 심심할 때 불르면 덜 심심하고, 놀 때 불르면 더 재미있꼬"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글쓴이는 민요라는 것이 때로는 노동이나 농사일과 직접 관계없는 것이라 해도 모두가 일하면서 부르던 노래였을 것이라는 가정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민요를 찾아가는 일은 곧 일의 현장, 삶의 현장을 찾아가는 것이라는 얘기다. 이런 과정 속에서 글쓴이는 이런 깨달음을 얻는다.

   어떠한 진보적인 이론도 현장에는 뒤져 있다는 사실도 알며, 우리 사회에서는 이미 사라진 것으로 우리가 치고 있는 우리의 전통적인 삶의 모습이 시골 어느 모서리인가에 남아서 이어지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시골은 우리가 이끌고 뜯어고치고 탈바꿈시켜야 한다는 건방진 생각을 가지고 대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속에 수용됨으로써 참되고 값진 우리의 삶과 문화가 새롭게 빚어질 수 있다는 사실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우리는 민요라고 하면 흔히 역사나 사회 현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을 읽다 보면 그것이 얼마나 좁은 생각인가를 알게 된다. 아래 인용한 노래는 전북, 경상도 등에서 채집한 노래인데, 모두 당시 사회상을 담고 있다.

 

  연락선은 가자고

   쌍고동을 트는데

   우리 님은 날잡고

  풀어줄 줄 모르네.

  어어어여 어어여

  이 내 몸은 가면은

  돌아올 길 없는데

  우리 님은 어이해

 

  파도소리 높거든

  내 우는 줄 알고

  까마귀가 울걸랑

  나 죽은 줄 알게나.

  어어어여 어어여

             (6․25 때 징병 나가면서 불렀다는 노래)

 

  물꼬 철철 물 열어 두고 쥔네 양반 어데 갔소.

   석자 수건 목에 두르고 첩의 방에 놀러 갔네.

               (양반에 대한 반항심을 담은 모내기 노래의 첫 구절)

 

 서울 넓은 연병장에

  3천만 민족이 다 오는데

  남의 님은 다 오시는데

  우리 님은 못 오시나.

  원자탄에 맞아 죽었나.

  외국 나라를 유람갔나,

  강원도 금강산 피리봉이

  평지가 되면 오실라나.

               (징용 갔다가 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낙네 노래 일부)

 

▶자기 땅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글쓴이는 이 책을 통해 단순히 민요에 얽힌 이야기만 하고 있지 않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설화, 전설에도 관심을 가지며, 지금 그 지역의 삶의 모습에도 눈길을 보낸다. 산업화 속에서 우리네 삶이 얼마나 변질되고 있는지, 우리의 뿌리가 되어야 할 전통 문화가 어떻게 단절되고 있는지 주의를 기울인다. 옛사람들의 삶과 지금의 삶을 비교하기도 하고, 지금 우리 삶과 문화의 문제점은 무엇인지도 파헤친다. 농촌 마을을 돌며 올바른 농정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실을 한탄하고 퇴폐적인 향락 문화가 판치는 것을 경계한다. 길에서, 차에서, 식당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다 글쓴이의 관심사이다. 농촌 총각을 만나 농촌의 현실에 함께 분개하고, 우연히 독립군 할아버지를 만나 역사의 숨결을 느끼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 민족의 삶의 자취, 아니 삶 자체인 민요를 만난다. 각 지방마다 특색과 공통점이 있다는 걸 느낀다. 민요를 통해 우리 문화를 만난다. 지금 우리네 삶의 현실과도 만난다. 또한 민요와 그 민요를 부르는 사람들, 그리고 그 민요가 살아있는 고장 사람들의 삶에서 질긴 생명력과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글쓴이의 정겨운 눈길과도 만난다. 자기 땅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갖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도 깨닫게 된다. 또, 우리 민요가 이렇게 구수하고 정겹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