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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화가 100인 작품

최초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1896 ~ 1946)의 그림

by 언덕에서 2007. 3. 5.

 

 

 

 

 

최초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1896 ~ 1946)의 그림

 

 

 

 

 

 

 == 1924년작 만주봉천 풍경 == 

 

 

 == 1928년작 자화상 == 

 

 

 == 1928년작 스페인국경 ==

 

 

 

 == 1928년작 프랑스 마을 풍경 ==

 

 

 

  == 1927년작 파리 풍경== 

 

    

 

  

 

 == 1922년작 농촌풍경 == 

 

  

 

  

== 1928년작 무희 ==

 

 

 

 

 == 1928년작 나부, 자화상 == 

 

 

 

 == 1927년작 파리풍경 == 

 

 
 

 == 1933년작 선죽교 == 

 

 
 

 == 1933년작 인천풍경 ==

 

 

 

 ==1935년작 화령전작약 == 

 

 

 

  == 1935년작 별장 ==

 

 

 

 

== 1937년작 다솔사 ==

 

 

 

 

 

 

 

 

 

 

 

 

 

 

 

 

 

 

 

 

 

 

 

 

 

나혜석. 서양화가. 호는 정월(晶月). 신문학을 존중하는 개화된 가정에서 기정의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도쿄에 유학중이던 오빠 경석의 권유로 1913년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유화를 전공했다. 유학시절에는 최승구ㆍ이광수와 사귀면서 동경 유학생 동인지였던 [학지광]에 여권신장을 옹호하는 <이상적 부인> 등의 글을 발표했다.

 1918년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함흥 영생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 미술교사를 지내다가 3ㆍ1운동에 참가 후 체포되어 수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 1920년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했고, 남편의 도움으로 1921년 서울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첫 전람회를 열었다. 서울에서 열린 최초의 서양화전시회로, [매일신보]의 기사에 의하면 "낙역부절하여 인산인해"였다고 한다.

 1923년 일본 외무성 관리가 된 남편을 따라 만주에 거주했다. 1927년 모스크바를 거쳐 프랑스ㆍ영국ㆍ이탈리아ㆍ스페인 등을 여행하면서 미술관과 박물관을 견학하고 파리에서는 야수파 계열의 그림을 그렸다. 제1~11회까지 조선미술전람회에 9번 출품하여 제3회 때 <가을의 정원>으로 4등상, 제4회 때 <낭랑묘(娘娘廟)>로 3등상, 제5회 때 <천후궁(天後宮)>으로 특선을 받았다.

 유럽 여행 중 사귄 최린과의 만남이 문제가 되어 귀국한 뒤인 1931년 이혼했다. 그 뒤 사회의 인습적인 도덕관에 저항하는 <우애결혼, 실험결혼><이혼고백서> 등 자신의 입장을 강변하는 글을 발표했으나 사회의 냉대로 점점 소외되었다. 1935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전시회를 열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그 뒤 수덕사ㆍ해인사 등을 전전하며 유랑생활에 들어가 정확한 행적을 알 수 없다. 1948년 서울 자혜병원에서 행려병자로 쓸쓸히 인생을 마감했다.

 나혜석은 1913년 일본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유화과(油畵科)를 마치고 프랑스 파리에 유학을 하였다. 귀국해서는 미술활동을 했는데, 그 무렵 조선미술전람회와 일본의 이과전(二科展) 등에 입선했다. 그러는 한편, 1918년에 [여자계(女子界)]가 창간되자 처음에는 <정순(貞順)>이라는 소설을 발표했다. 이어서 [여자시론(女子時論)]지에 시를 발표하고 문학동인지 [폐허]의 동인이 되었다.

 봉건성이 농후했던 그 당시에 가장 첨단을 걸은 복장과 사교와 생활 태도를 보이면서 한국 최초의 연애결혼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철저하게 자유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철두철미하게 여성 해방과 남녀평등의 사상을 표현했다.

 그녀의 작품은 크게 1918년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 졸업 때부터 1927년 무렵 만주 봉천 시기까지, 유럽 체류에서 1930년대 초반까지 그리고 미술활동을 거의 중단한 이후의 3시기로 나눌 수 있다.

 초기에는 사실주의적 경향의 작품을 그렸다. 1924년 판넬에 제작한 <만주 봉천 풍경>은 안정된 구도에 색채의 표현이 부드럽고, 비교적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어, 서양화 도입 초기의 사실주의적이고 인상주의적인 화풍을 견고하게 다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유럽 여행을 통해서는 활달한 필치와 과감한 표현으로 점차 바뀌어갔다. <자화상>(1928)에서는 강한 색채의 대비적 효과를 살린 표현기법으로, <스페인 해수욕장>(1928경) <불란서 마을 풍경>에서는 거침없는 필치에 자유분방한 기법으로 야수파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1931년 이혼 이후 생활과 정신의 불안정을 반영하듯 작품에는 생동감과 활발함이 사라졌으며 작품창작도 거의 하지 않았다. 죽은 뒤에 그의 글을 모아 <날아간 청조><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 등이 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