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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오정희 단편소설 『바람의 넋』

by 언덕에서 2024. 2. 13.

 

오정희 단편소설 『바람의 넋』

 

오정희(吳貞姬.1947∼)의 단편소설로 1982년에 발표되었다. <동경>, <하지>, <야희>, <저녁의 게임> 등과 함께 그의 대표작 중의 한 편이다.

 작가 오정희의 소설은 사건의 기술이 아니라, 의식의 내면세계의 묘사로 이루어진다. 오정희의 인물들은 타인들과 철저히 단절되어 있다. 나와 타인의 관계라는 점에서 보면, 오정희 소설이 주는 한 인물의 의식 세계는 타인 존재를 무화(無化)시키는 유아론적(唯我論的) 고립의 세계이다. 타인의 존재는 그 존재를 겁탈당하고 인식의 대상이 되어 버리며, 나와 타인의 대립 관계가 아니라 이익 관계가 되는 것이다. 나의 의식 세계는 나와 타인의 대립 관계를 나와 대상의 관계로 바꾸어 버리는 셈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세중은 자기 자신을 평범하고 모질지 못한 남자로 생각하고 그것에 만족하면 살아가는 30대의 은행원이다. 세중의 아내인 은수는 가출벽이 심하고, 다섯 살짜리 승일이는 이미 엄마의 잦은 부재(不在)에 익숙해져 있다. 처음엔 세중도 아내의 가출을 여자의 감상벽 정도로 가볍게 처리하고자 했었다.

 어느 날 친정에 가던 버스에서 산에 반한 은수는 혼자 산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세 남자에게 윤간을 당하고 밤늦게 귀가한다. 그러나 세중은 은수를 쫓아내고 시골 어머니께 전후 사정을 설명할 것 없이 '곧 올라오셔야겠다'는 전화를 한다.

은수가 은행으로 세중을 다시 찾아갔을 때, 세중은 적금을 해약한 돈 이백만원을 주며 잠정적 별거를 선언한다. 그 뒤 은수는 친정 어머니와 함께 지내게 된다. 은수는 친정 어머니의 친딸이 아니었다. 은수도 어려서 사촌의 입을 통해 들어 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은수는 그때부터 이 집은 내 집이 아니라는 생각과 잠시 머물러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최초의 기억으로 뚜렷이 남아 있는, 햇빛에 하얗게 바랜 너른 마당과 함부로 나뒹굴어 있던 두 짝의 고무신은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지 안고 싶어한다. 세중과 결혼할 무렵 은수는 어머니께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는다. 그러나 은수는 자신이 전쟁 고아로 생부의 친구에 의해 길러진 것임을 알아냈을 뿐, 최초의 기억 이전의 일에 대한 궁금증을 풀지는 못한다. 은수는 어린 승일이를 데리고 최초의 기억 이전의 일과 만날 것 같은 기대와 안타까움으로 자신이 자란 항구 도시인 M시를 헤맨다.

 서울로 온 은수는 승일을 남편에게 빼앗기고 난 뒤, 어머니께 다시 그것에 대해 묻는다. 그리고 그 최초의 기억 이전의 일을 알게 된다.

 피난을 못 가고 남아 있던 식구들이 모두 도둑들에게 참혹하게 살해되었던 것이다. 어린 은수는 변소에 숨어 그 광경을 목격했다. 살아 남은 은수는 혼자 근 1년 전에 엄마의 손을 잡고 오던 길을 더듬어 시의 끝에서 끝까지 아버지의 친구 집을 찾아왔다. 은수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아 어머니는 적군의 철수 소식을 듣자 그 집으로 가 보았다.

 은수는 햇빛 가득한 마당에서 부옇게 먼지를 쓰고 나뒹구는 두 짝의 검정고무신만을 멀건히 바라볼 뿐 절대로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아이를 남겨 두고 안으로 들어간 어머니는 부엌 앞에 쓰러진 여자와 다락층계에 엎어진 남자와 마루에 엎드려 있는, 이미 얼굴을 찾아볼 수 없게 부패한 여자 아이의 시체를 보았다.

 

 작가는 섬세한 내면 정경을 묘사하면서 인간의 존재론적 불안을 섬뜩하게 드러내는 작품들로 크게 주목을 받았다. 초기에는 육체적 불구와 왜곡된 관능, 불완전한 성(性) 등을 주요 모티프로 삼아 타인들과 더불어 살지 못하고, 철저하게 단절되고 고립된 채 살아가는 인물들의 파괴 충동을 주로 그렸다. 그러다 1980년대 이후에는 중년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사회적으로 규정된 여성의 존재보다는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여성성을 찾는 작업에 주력하였다.

 「바람의 넋」에서는 간절한 충동으로 집 밖을 떠돌더라도 결국 이상적인 세계를 만날 수는 없다는, 그 영원히 좌절할 수밖에 없는 삶의 굴레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근원적 존재상이 허무의 심연이라면, 그리하여 그것을 문득 감지하고 엿본다면, 그 감지와 엿봄은 전율이며 공포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문학평론가의 평처럼, 작가는 특유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눈’을 통해 허무에 천착해 우리 존재의 그 앙상함에 잔잔한 진동을 전해온다.

 

 

「바람의 넋」에서 은수가 찾아 헤매었던 그 참혹한 장면은 대면하기에 공포스럽고 전율스러워서 회피하고 싶지만, 존재의 진실이기에 대면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 존재, 존재의 심연 그리고 존재의 진실과 의미론적으로 겹쳐지고 있다. 그 참혹한 장면의 목격이라는 체험 자체가 존재의 심연에의 응시로 파악될 수 있다.

 따라서 오정희의 소설 공간은, 나와 타인의 대립 관계 속에서 '나'의 존재론적 의미를 드러내는 구조를 보이는 특징이다. 그것은 한 인물의 의식 세계를 다룬 그의 소설들은 '나'라는 존재의 진실에 대한 추구를 보여 주며, 또 나와 타인과의 대립 관계를 다룬 소설들은 '나'들이 공존하는 존재상에 대한 추구를 보여 준다.